학계내 불거진 '자유민주주의' 개칭 논란
학문적 근거 탄탄치 못한 내부 문제 드러내
학계, 자신들의 입장 왜곡하는 언론 비판보다
스스로 내실 다진 학계 만드는 데 앞장서야

학술부장
“이름이 절대 나오지 않게 부탁드립니다.”(‘취재수첩’, 『대학신문』 9월 13일자) 학내의 한 시설노동자는 자신의 부당한 처지를 토로하며 우리 기자에게 자기 이름이 실리지 않게 해달라 간청했단다. “에이즈의 날을 맞아서 또 언론에서 반짝 관심을 보이는 것이 아니냐.”(‘이해와 차별 사이’, 『대학신문』 11월 22일자) 취재원으로부터 기자가 당했던 냉대를 들으니 오히려 에이즈란 질병에 대한 우리의 편견과 무관심이 새삼 느껴졌다.

기자의 ‘활인검(活人劒)’을 가장 위력적으로 보여주는 멋진 섹션이다, 라고 정치·사회면의 ‘취재수첩’ 코너를 부러워 했다. 『대학신문』 학술면 기사의 대부분은 학계의 연구 성과 및 신간을 독자에게 소개하는 것이고, 그에 따라 나는 사회 부조리나 소외된 계층의 목소리에 주목하기보다 두꺼운 단행본과 난해한 논문들과 씨름해야 했으니까.

언젠가 ‘전자책’ 기사에 대한 자문을 얻기 위해 언론정보학과의 L교수를 찾아갔을 때의 한 장면. “기성 언론 기자들이 나한테 찾아와서 멘트 하나만 해달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내 책 한 권, 논문 한 편 읽지 않고 필요한 말만 싹 빼가려는 게 괘씸해서 화를 내며 돌려보낸다. 네 지금 행동이 그런 사람들과 다를 게 뭐냐.”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고 내용이 어려워서 그랬습니다, 라는 변명이 목에 걸렸지만 감히 뱉지 못했다. 논문과 책이 어지러이 널린 교수님의 책상에서 느껴지는 연구자로서의 열정에 스스로 더 부끄러워졌기 때문이다.

“교수님들이 일간지 기사 대부분이 엉터리라는데.” 문득 그 일이 생각난 건 이번에 ‘빛보다 빠른 입자’ 기사를 작성한 우리 기자의 푸념 때문이다. CERN의 이번 실험 결과에 대한 기사 대부분이 원리에 대한 설명보다는 ‘시간여행 가능’, ‘상대성이론 폐기’ 등과 같은 자극적 요소만 부각하고 있다는 것. 교수님들에게 취재를 하면 할수록 기성 언론의 모습은 ‘호들갑’으로 비친다는 것. 만약 신문은 원래 그런 거라고, 그런 헤드라인을 뽑아내는 게 저널리즘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 저널리즘보다, “공부도 없이 대뜸 ‘전자책이 뭐에요?’라고 묻는 건 학술부 기자로서 실격”이라던 L교수님의 말씀을 따르려 한다.

이를 취재수첩으로 써볼만하지 않은가, 라고 생각했었다. 학자들의 연구 성과에 대해 단편적인 보도에 그침으로써 오해를 조장하는 언론의 행태, 분명 ‘취재수첩 감’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번 ‘자유민주주의’ 논란을 보며 저렇게 취재수첩을 쓰는 건 너무 순진한 게 아닐까 하고 문득 불편함을 느꼈다. 자유민주주의 개칭의 찬성 입장을 보도한 일간지 기사 역시 학문적으로 탄탄하지 못한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고 생각됐지만, 이는 기자들이 소위 ‘공부’를 하지 않고 기사를 작성했기 때문이라기보다 학자들이 충분한 학문적 근거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 아닌가, 라는 의구심이 들었기에.

자유민주주의 개칭을 찬성하는 학자들의 근거가 타당한지는 L교수님의 말처럼 스스로 공부하지 않고선 알 수 없으리라. 만약 그래도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찬성하신 학자들에게 직접 여쭐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일제에 항거한 다양한 사상적 배경의 민족 지사들을 ‘자유민주주의’ 이념으로 묶을 수 있는지. 오늘날 대한민국을 있게 한 민주화 운동의 정신을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념으로 다 포괄할 수 있는지.
그러나 이에 대해서 용어 개칭을 제안했다던 모 학회의 뚜렷한 학문적 설명을 찾을 수 없었다. 더구나 우리 기자의 수차례 전화 연결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것은 그저 우연일까. 만약 용어 개칭 제안이 학문적 근거가 아닌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었다면, 그리고 논쟁이 심화되자 그저 수면 아래로 숨어버린 것이라면 과연 이들은 ‘사이비 학술 단체’라는 비판을 피해갈 수 있을까.

사실 이런 일이야말로 학술부에서 취재수첩으로 써야할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 학계가 건강하지 못하다면, 마땅히 기자가 활인검을 휘둘러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학계 입장을 왜곡하는 언론을 비판하려 할 때보다 취재수첩을 쓰는 게 마냥 신나지만은 않았다. 지금에서야 내가 지니고 있었던 학계에 대한 상(像)이 생각보다 확고했음을 깨닫는다. 학계라는 곳은 지적 탐구심과 학문적 양심으로 똘똘 뭉친, 그에 따라 열심히 연구 성과를 내놓는 성역(聖域)이라고, 정치적 외압따위에는 휘둘리지 않아야 할 곳이라고. 나의 그 믿음이 철없는 생각이었다는 걸 깨달은 게 좀 씁쓸해서, 당장은 취재수첩을 쓸 맘이 생기질 않는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