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아닌 이념 논쟁이 뜨겁다. 지난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는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사회과 교육과정’에서 ‘민주주의’ 개념을 ‘자유민주주의’로 변경해 고시했다. 이에 역사과 교육과정을 검토, 심의하는 ‘역사 교육과정 개발 추진위원회’(역추위) 소속 위원 20명 중 9명이 사퇴하며 자유민주주의를 둘러싼 논쟁이 점화됐다.

특히 개정 고시안에 반영된 개칭이 뉴라이트 계열 ‘교과서포럼’의 후신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는 ‘한국현대사학회’의 제안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개칭을 둘러싼 이번 논란이 더욱 확산됐다. 지난달 이 문제를 둘러싸고 여야 국회의원 간에 이념성을 띤 수위 높은 발언이 오가며 교육과학기술위원회 국정 감사가 파행됐고 이후 학계 인사들 간에도 끊임없는 견해 대립이 이어지고 있다.

고시 과정의 절차적 결함

교육과정 고시는 개정안을 역추위와 국사편찬위원회가 여러 차례 검토하고 최종적으로 교과부의 심의를 거쳐 이뤄진다. 사퇴 위원들은 이번 문제가 교과부 심의과정까지는 ‘민주주의’로 통과된 개정안이 교과부 장관 고시에서 충분한 검토 과정 없이 ‘자유민주주의’로 개칭된 것에 있다는 입장이다. 오수창 교수(국사학과)를 비롯한 위원 9명은 사퇴 성명서에서 “교육현장에 심대한 변화를 불러올 교육과정안 변경 고시를 추진위가 회의 한 번 없이 위원장의 개인적 판단으로 결정한다는 것은 중대한 절차적 결함이므로 수용하기 힘들다”라고 발표하고 지난달 30일 집필 기준을 정하는 회의에도 불참했다.

사퇴 위원들이 지적하는 고시의 또 다른 문제점은 교육과정의 비일관성이다. 사회과에 속한 ‘법과 정치’ ‘사회·문화’ 등 법질서와 사회 이념, 헌법을 정면을 다루는 과목들의 교육과정에서는 ‘자유민주주의’ 개념을 찾아볼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가 교육과정에 명시돼 학생들에게 꼭 가르쳐야 할 개념이라면 먼저 ‘법과 정치’와 같은 다른 교과과정으로 먼저 다뤄줘야지 역사 과목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것은 교육 현장에서 큰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는 지적이다.

한국의 현실 속에 있는 자유민주주의의 얼굴은?

개정 고시안에서 ‘자유민주주의’ 용어의 개념을 정립하는 충분한 학문적·사회적 검증과 합의를 거치지 않고 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이번 논란의 핵심 문제로 꼽힌다. 사퇴한 위원들은 현재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를 비대하게 강조하는 좁은 의미의 자유민주주의를 의미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오수창 교수는 “포털에서 검색만 해도 알 수 있듯 한국에서 사용되는 ‘자유민주주의’는 대개 복지를 최소화하고 경제적 자유의 극대화를 외치는 ‘신자유주의’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고 언급했다. 자유민주주의가 쓰이기 위해서는 이 용어가 한정된 의미로 인식될 수 있다는 우려를 불식할 수 있을 만큼 우선 사회적으로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교과부, 일부 보수 언론과 한국현대사학회 등 이번 자유민주주의로의 개칭을 찬성하는 측에서는 자유민주주의가 민주주의와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 보수 일간지는 지난 8월 방한한 미국 스탠퍼드대 래리 다이아몬드 정치·사회학 교수가 “한국 내 좌파가 자유민주주의를 문제 삼는 것은 신자유주의와의 혼동 때문인데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발전된 형태이지 신자유주의로만 해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보도하며 개칭을 반대하는 측이 자유민주주의의 개념을 오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조선일보」 8월 18일자).

또 개칭 찬성 측은 자유민주주의가 민주주의보다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이 구체화는 인민민주주의와의 대비에서 두드러진다. 한국현대사학회 소속 이명희 교수(공주사대 역사교육과)는 언론을 통해 “민주주의에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민중민주주의, 인민민주주의 등 여러 갈래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혼용하여 사용된다”며 “대한민국이 역사적 전개 과정을 통해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와 다른 것들, 그중에서도 특히 인민민주주의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 의의를 밝혔다(「조선일보」 8월 21일자). 즉 사회주의적 경제 질서를 기본으로 하는 인민민주주의의 반대 개념으로서 자유민주주의를 도입하자는 견해다. 이처럼 개칭 찬성 측에서는 자유민주주의 개념의 정초가 인민민주주의에 대한 반대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도 자유민주주의는 이미 학술적으로도 정립된 개념어로 복지나 사회 공공을 위한 정책을 마련하는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민주주의 개념을 고수하는 측에서는 실제 현실의 용례에서 자유민주주의가 갖는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자유민주주의가 학술적 개념으로 어떤 의미를 지닌 용어인지와는 별도로 개칭을 통해 역사 인식의 틀이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것이다. 오수창 교수는 “자유민주주의가 시장 질서를 강조하는 이념으로 인식되기 쉬운 한국 현실에서 현대사 인식의 틀을 민주주의에서 자유민주주의로 바꾸는 것은 심각한 역사왜곡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했지만 시장 경제 민주주의가 아닌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했던 독립 운동가들이나, 건국 이후 다양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민주화 운동이 시장 경제 질서를 기초로 하는 좁은 의미의 자유민주주의 틀에서만 평가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헌법과 자유민주주의

이외에도 개칭 찬성 측이 언급하는 자유민주주의 개칭의 주요 논거는 바로 헌법에 대한민국의 기본질서가 ‘자유민주적’이라는 표현이 있다는 것이다. 유상범 교과부 교육연구사는 “이번 교육과정 개정 고시안에 반영된 ‘자유민주주의’로의 개칭은 헌법의 정신과도 맞다”며 “헌법 전문과 4조에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적시돼 있으며 이에 입각해 대한민국이 성립됐다는 것은 헌법학자들의 통설이자 여러 판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 헌법이 대한민국의 기초로 자유민주주의를 명시하고 있는 것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자유민주’라는 말이 똑같이 들어간다고 해서 ‘자유민주적 질서’와 자유민주주의가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일단 헌법에서는 대한민국의 기초 이념이 자유민주주의라고 명시해 놓은 부분이 없다. 현행 헌법에 대해 법제처 공식 홈페이지가 영문으로 표기하고 있는 부분에서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뜻하는 ‘the liberal-democratic basic order’이 아니라 ‘the basic free and democratic order’로 나타나 있다.

또 헌법 전문과 4조에 있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표현은 독재시기에 제정된 유신 헌법부터다. 따라서 이 용어 자체가 한국의 헌법 정신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 박명림 교수(연세대 지역학협동과정)는 계간지 『역사비평』에 수록한 논문 「박정희 시기의 헌법 정신과 내용의 해석-절차, 조항, 개념, 의미를 중심으로」에서 “제헌헌법부터 1969년 헌법까지 ‘민주주의 제(諸) 제도’로 존재했던 표현이 유신 헌법에서 ‘자유민주적 질서’로 바뀌었다”며 “이는 독재 체제의 안정을 위해 종래 헌법 속에 있었던 ‘민주주의’를 약화하고 반공적 테제로 시장 경제 질서를 포함하고 있는 표현을 삽입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에 헌법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표현이 있다고 해서 이를 현재 가열되고 있는 교과서 속 자유민주주의로의 개칭 논란에서 주요한 근거로 쓰는 것이 맞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김종철 교수(연세대 법학부)는 “자유민주주의로의 개칭을 서두르기보다 우선 전제가 되는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충분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학자마다 다른 자유민주주의 개념

한편 쟁점이 되는 자유민주주의의 학술적 개념 정의 자체도 아직 완전히 합의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정치학계의 중론이다. 유홍림 교수(정치외교학부)는 “이념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정치적 구분과 학술적 구분이 다른데 이념의 학문적 정의는 대개 학자마다 다른 여러 견해들을 아우를 수 있는 포괄적인 방향으로 이뤄진다”고 언급했다. 자유민주주의는 중하층 계급을 포괄한 다수 민중이 지배한다는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법제 마련을 핵심으로 하는 자유주의의 결합으로 이뤄져있다. 유 교수는 “갈등의 요소가 있는 두 개념을 결합한 자유민주주의는 공적 자율성과 개인적 자율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에 따라 학자마다 다르게 파악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가령 앞서 언급된 래리 다이아몬드 교수의 경우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심화된 높은 단계의 특성을 가지며 권력에 대한 강한 통제, 강력한 법치주의, 정부의 높은 투명성, 개인 권리의 폭넓은 두터운 보호를 내용으로 한다”고 자유민주주의를 인식한다. 반면 최갑수 교수(서양사학과)는 “민주화란 언제나 더 많고 더 좋은 민주주의를 위한 완성의 도상에 있는 것이며 정치적 자기결정의 주체, 범위 등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한다”라며 “자유민주주의는 평등한 투표권, 대표에 의해 통치되는 정부와 같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기본 요건을 갖춘 최소한의 정치 체제”라고 언급했다. 즉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최소체제일 뿐이며 민주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발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직까지는 학자들마다 자유민주주의를 파악하는 방식이 다양하고 하나로 합의된 바가 없다. 오수창 교수는 “자유민주주의 개념은 자기 모습을 뚜렷하게 보이기보다 때로는 시민들이 심상하게 받아들이는 의미 뒤에 숨고 때로는 헌법에 담긴 유사한 구절을 ‘신분증’ 삼아 내보이면서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고 밝혔다.

역추위 위원 20명 중 9명의 사퇴에도 불구하고 교과서 검정 과정은 단계적으로 진행되고 있어 앞으로도 민주주의의 자유민주주의 개칭 논란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집필, 검정 과정을 거친 교과서는 12월에 확정되고 2014년부터 적용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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