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강의실에서 만나는 한국의 얼

한옥학교, 염색학교가 신설되는 등 전통을 보존, 계승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한 최근, 이제는 우리가 계승할 전통의 정신이 무엇인지도 고민해 볼 시점이다. 『대학신문』은 전통에 대한 고민을 계속한 선생님의 학내 개설 수업에 참여해 이들이 수업에서 말하고자 하는 우리 얼의 모습을 담아보고자 한다. 기자가 수업에서 직접 체험한 전통의 모습과 더불어 사제 간에 전해지는 이들 내면의 소리도 함께 전한다.

연재순서
① 이애주 교수(체육교육과)-무용사
② 김민자 교수(의류학과)-복식 디자인 특론
③ 김영기 국악과 강사-정가 전공수업
④ 이지영 교수(국악과)-가야금 전공수업

한 주에 네 차례, 53동에 위치한 이지영 교수(국악과)의 연구실은 ‘교수만의’ 공간에서 살짝 벗어난다. 학생들이 제23호 가야금 산조·병창 이수자인 이 교수에게 일대일로 가야금 산조 지도를 받기 위해 찾아오기 때문이다. 하루에 서너명씩 한 시간 단위로 수업이 이어지는 만큼 오전 내내 이 교수의 연구실에서는 두 대의 가야금이 빚어내는 정겨운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기자가 연구실을 찾았을 때는 김병호류 가야금 산조 수업이 한창이었다. 마주 앉은 사제는 지난 시간에 수업했던 산조의 끝부분을 함께 맞춰보고 있었다. 가장 남성적인 분위기를 띤다고 평가 받는 이 산조는 왼손으로 떨거나 꺾으며 소리를 표현하는 기법인 농현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수업 내내 이 교수는 이 산조의 묘미를 살릴 수 있도록 “이 부분은 꺾지 말고 흐르듯이 연주하라”거나 “관절 움직임에 따라 달라지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라”는 식의 꼼꼼한 지적을 보태며 정확하고 세밀한 소리의 표현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교수가 이렇게 농현에 집중하는 이유는 가야금 산조의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선율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같은 음일지라도 농현에 따라 다양한 선율을 전개하며 고유한 음색을 덧입히는 국악의 특징은 화음이 부각되는 서양 음악과 차별화된다. 이 교수는 “직선적인 음들이 쌓여 화성을 이루는 서양 음악과는 달리 우리 음악은 농현으로 음에 변화를 주며 소리를 하나하나 다듬는다”며 “연주 전반에 걸쳐 ‘어떤 선율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농현의 적극적인 활용은 정악의 절제미와는 또 다른 산조만의 매력을 만들어낸다. 가야금 산조의 풍부한 음색과 다양한 선율에는 연주자의 심리 흐름이 여과 없이 자유분방하게 드러나 있다. 가쁜 호흡을 조절하며 험준한 산을 오르내리듯 풀고 조임을 계속 반복하는 산조 가락은 우리 민족 특유의 한(恨)을 풀어가는 과정이 담겨있다. 이 교수는 “산조는 느릿한 진양조장단에서 시작해 점점 빨라지면서 흥을 몰아간다”며 “이런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자연히 한을 흥으로 승화시키는 우리 민족의 ‘신명’을 느낄 수 있다”고 산조의 의미를 밝혔다. 이어 그는 “개인적으로도 힘든 일이 있으면 종종 산조를 연주하며 심리적 위안을 찾기도 한다”며 웃음지었다.

수업 시간이 절반쯤 흘렀을 무렵 기자는 문득 고개를 갸웃하게 됐다. 구음과 장구로 장단을 짚어주던 이 교수가 “이번에는 내가 연주할 테니 녹음을 하라”며 새로운 가락을 타기 시작했기 때문. 녹음을 마친 학생들은 그 가락을 계속 되풀이해 들으며 새 가락을 익혀간다. 이 교수의 이러한 수업 방식은 악보에 의존하지 않고 온전히 소리를 통해서만 가락을 전하는 우리 전통의 산조 교육법에 근거한다. 이러한 전통적인 산조 교육 방식은 ‘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가르친다’하여 구전심수(口傳心授)라 불린다. 이 교수는 “본래 산조는 악보 없이 연주되는 즉흥곡에서 시작된 만큼 악보 없이 배워야 산조다운 산조를 익힐 수 있다”며 “구전심수는 마음으로 산조를 느끼게 할 뿐 아니라 소리에 대한 집중도를 높여준다”고 말했다.

다양한 농현을 타고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가야금 선율을 듣고 있으면 한이 어느덧 흥으로 번지는 마음의 농현이 인다. 이렇듯 가야금 산조는 오늘까지도 선조들의 신명 풀이 과정을 고스란히 담은 채 마음으로 이어지며 그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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