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지역 주민과 개발사 간 갈등
법적 판단만으로 근본적 해결 못해
폭력의 현장에 침묵하지 말고
합리성과 제도를 넘어서는 고민해야

사진부장
seechless는 지시적 의미로  ‘놀라서 말을 못하는’, 혹은 ‘말문이 막힌’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나는 사진기자 생활을 1년 반 동안 하면서 이 단어를 붙이는 것이 적절하다고 느낀 경험이 한 번 있다.

지난 4월 말 사회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재개발로 인해 지역 주민과 개발사 간에 갈등을 빚고 있는 마을의 사진취재가 필요하단다. 여느때처럼 사진기를 들쳐메고 나선 나는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펼쳐진 광경에 난감해졌다. 낡고 허름한 집과 침체된 마을 분위기, 샛노란색의 플래카드 정도는 예상했었다. 그러나 그 집들이 용역의 해머질로 난 구멍을 통해 안을 훤히 드러내고 있을 것이라고, 그럼에도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듣는다. 아이와 함께 자고 있던 새벽에 여러명의 발걸음 소리와 함께 벽에 구멍이 났다고, 대학생 딸 3명이 잠옷 바람으로 끌려나와 모욕을 당했다고, 용역들이 집에 들어가지 못하게 계단을 부수고 집안에 용변을 봤다고…….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에 말문이 막혔다.

사정은 이랬다. 양녕대군 묘역을 관리하는 재단의 소유지에 형성된 마을의 대지를 재단이 개발사에 팔아 재개발이 이뤄지고 있었다. 보통 재개발은 입주권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기존 거주민과의 협상이 이뤄진다. 하지만 법원에서 마을 거주민의 거주권을 인정하지 않아 주민들이 ‘합법적’으로 보상받을 길이 사라졌다. 강제철거 현장에는 경찰도, 모 방송사의 기자와 카메라도 있었다. 그러나 합법을 이유로 경찰은 주민들의 시선을 외면했고 카메라는 침묵했다. 그사이 그들이 보호하고 대변해야 할 사람들은 말 못할 수모를 당한다. 도대체 합법은 무엇인가? 왜 언론마저 침묵하는가? 아하, 그들도 말 못할 사정이 있었음을 알겠다.

내가 『대학신문』에 사진기자로 입사지원하던 때를 회상해본다. 그 시절엔 문자로 구성되는 기사보다도 사진 한 장이 더 큰 영향력을 가진다고 믿었더란다. 현장에서 보고 느끼는 것을 그대로 전달하고 싶다는 열정을 품었더란다. 하지만 상도4동을 가던 날엔 이미 어떤 사진이 지면에 실릴 수 있는지, 어디까지가 사진이 넘을 수 있는 선인지 체득하고 있었다. 신문사에선 ‘논조’를 흐릴 수 있는 사진은 없느니만 못했다. 이성적이고 보편적으로 타당한 논조는 언제나 사진에, 현장에 우선했다. 결국 현장에 있던 나 역시 일정 정도의 침묵을 당연시하고 있던 것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대학 교실에선 ‘합리적, 이성적’이란 단어는 ‘낡은 근대의 것’­으로 치부한다. ‘낡은’이라는 수식어를 쓴 이유는 그것이 오래 된 개념이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그 시대가 가졌던 해당 개념에 대한 맹신이 부작용을 만들었음을 현 시대에 인정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법적, 타당한’이란 요즘 단어는 어떤가? 지시적 의미 차이의 정밀성을 따질 것 없이, 앞의 단어들과 뒤의 것들의 핵심적 차이는 현시대에서 사용되는 빈도차이뿐이다. 아니, 어쩌면 아직도 앞의 단어들의 사용빈도가 상당한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여전히 이성과 합리성, 제도에 대한 ’근대적 맹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상도4동에서의 취재가 끝나갈 무렵, 나는 말문이 막힌 채 한 할머니와 한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미 사진기를 들이대는 것은 포기했고, 사진기를 어깨에 매어둔 채 하염없이 이야기를 들었다. 취재 중반까지 갖고 있던 어딘가에 ‘조화로운 중재자’가 있으리란 믿음은 깨졌다. 그 순간 내가 느끼고 있던 것은 죄스런 감정이었다. 맹신으로 인한 결과를 목도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들이 고통과 절망으로 괴로워할 때, 나(우리)는 어디에 있었는가? 위로가 될 수 있는 말을 하려 한참 머리를 굴리다가 소용없다는 생각에 그만뒀다. 그리고 손을 꼭 잡았다. 언어를 거치지 않고 직접 전달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서다. 나는 그날 말없이 공감하는 것으로서의 speechless를 알게됐다.

아직도 상도4동의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을 믿지 않는다. 늦기 전에 찾아가야겠다. 말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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