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프로야구가 개막 30주년을 맞이했다. 지속적인 흥행을 바탕으로 야구라는 스포츠는 이제 대중적인 인지도를 확보한 하나의 문화코드가 됐다. 이와 더불어 한국 특유의 독특한 야구 응원과 그를 아우르는 관중들의 관람 에티켓도 성장했다. 『대학신문』에서는 먼저 프로야구 30년 동안 있었던 굵직한 이야기들을 현재의 모습과 함께 조명해 보고, 이어진 인터뷰에서는 이광환 원장(베이스볼 아카데미)을 통해 한국 야구가 나아갈 길을 살펴본다.

1982년: 한국 프로야구, 막이 오르다

박민규 소설가의 책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오후 1시 15분 ‘어린이에겐 꿈을! 젊은이에겐 낭만을!’이라는 구호와 함께, 마침내 프로야구라는 이름의 한 마리 나비가 되어…하늘로 날아올랐다”고 1982년 프로야구 개막 상황을 묘사한다. 소설 속 삼미 슈퍼스타즈(인천)를 포함한 MBC 청룡(서울), 롯데 자이언츠(부산), OB 베어스(대전), 삼성 라이온즈(대구), 해태 타이거즈(광주)의 6개의 팀으로 우리나라의 프로야구는 그 서막을 알렸다.

1982년 3월 27일 지금은 사라진 동대문 운동장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시구로 시작된 프로야구는 극적인 개막전 승부로 시작부터 굉장한 열기를 띠었다. 이날 MBC 청룡은 삼성 라이온즈에 연장 10회 말 끝내기 만루 홈런으로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다. 당시 MBC 청룡의 감독이자 현재까지도 유일무이한 ‘4할 타자’의 기록을 보유한 있는 프로야구은퇴선수협의회 백인천 초대회장은 “한국 프로야구의 시작과 함께 선수로서 활동했던 것은 모험이자 즐거운 기억”이라며 “0.412의 타율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도 내가 잘해야 한국 프로야구가 산다는 사명감 때문이었을 것”이라며 웃음 지었다. 원년의 한국시리즈는 3승 1무 1패로 삼성 라이온즈를 물리친 OB 베어스의 우승으로 마무리됐다. 그에 따라 OB 베어스의 마스코트는 물론 OB 맥주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1983년: 더 나은 미래를 향해, 2군 창설

1983년 OB 베어스는 신인 발굴과 폭넓은 선수층 확보를 목표로 가장 먼저 2군을 창설해 혹독한 훈련을 실시했다. 이후 삼미 슈퍼스타즈가 10여명을 2군으로 편성하면서 1984년 5월 OB 베어스와 삼미 슈퍼스타즈 간 첫 2군 경기가 치러졌다. 치열하게 훈련하며 받쳐준 2군의 존재 덕분일까. 이후 OB 베어스는 에이스 투수의 부상으로 ‘맡아놓은 꼴찌’라는 당시의 예상을 뒤엎고 1984년 전기-후기 양대 정규 리그에서 각각 2위를 기록하는 한편 100경기 합산승률 종합 1위를 차지했다.

팀들 간 자율경기 수준에 머무르던 2군 경기는 1989년에 이르러서야 팀당 62게임씩을 치르게 되면서 공식 리그로 정착된다. 이후 2008년 ‘퓨처스 리그’라는 정식 명칭을 얻게 된 2군 리그는 현재 남부리그(△기아 타이거즈 △넥센 히어로즈 △롯데 자이언츠 △삼성 라이온즈 △한화 이글스)와 북부리그(△경찰청 △두산 베어스 △LG 트윈스 △상무 △SK 와이번스)로 나뉘어 경기를 치르고 있다.

이렇게 2군 리그는 20년 이상 꾸준히 운영되고 있지만 시설 및 처우 개선은 여전히 요원하기만 하다. 2군 선수들의 한 끼 식비는 1군 선수들의 절반 수준. 숙소 역시 2군 선수들에게 지급되는 숙박비로는 여관에 묵을 수밖에 없다. 1군 선수들이 호텔에 묵는 것과 비교하면 천양지차인 셈이다. 시설의 열악함도 꾸준히 지적되고 있다. LG 트윈스의 2군 구장인 구리 리틀야구장은 2군 구장들 중 가장 시설이 좋다고 평가 받고 있지만 선수들의 라커룸과 샤워장조차 갖춰져 있지 않다. 기아 타이거즈의 2군 구장인 군산 월명야구장은 인조잔디가 낙후돼 선수들의 부상 위험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경찰청 유승안 감독은 “2군은 1군에 비해 부대시설을 비롯한 제반 여건이 부족해 인프라 확충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2009년 기아타이거즈의 김상현 선수는 9년간의 2군 생활을 딛고 MVP의 영예를 안았다. 이처럼 당장 실력이 부족하더라도 2군 선수는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아 1군 선수라는 보석이 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실질적 처우 개선으로 창창하게 펼쳐질 그들의 ‘퓨처스’를 기대해 본다.

1991년: 야구장의 상징, 막대풍선의 등장

오렌지색 쓰레기봉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열정적으로 소리를 질러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혹은 막대 풍선을 들고 목이 쉬도록 응원가를 불러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프로야구의 매력을 한 단어로 줄일 수 있을 법하다. 바로 ‘응원’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프로야구 최초의 응원단장은 누구일까. 임갑교씨는 1982년 3월 해태 타이거즈가 롯데 자이언츠에 대패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발적으로 응원에 나섰다. 이때부터 구장에는 호루라기와 337박수, 기차 박수 등 구령박수가 울려 퍼졌다. 침묵이 강요됐던 1980년대에 관중들은 야구장에 모여 목청껏 ‘목포의 눈물’과 ‘부산갈매기’를 불렀다.

90년대부터는 새로운 응원문화가 자리를 잡았다. 현재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막대풍선은 1991년에 처음 등장했다. 빙그레 이글스가 해태 타이거즈와 경기를 치른 한국시리즈에서 관중들에게 막대풍선을 나눠주면서 처음으로 막대풍선이 사용됐다. 이어 1992년 정규시즌에서 LG 트윈스가 막대풍선을 도입하자 나머지 구단들도 경쟁적으로 구단의 상징색과 엠블럼을 넣은 막대풍선을 개발했다. 비행기 이착륙 소음과 맞먹는 100데시벨 가량의 막대풍선을 두들기는 것은 이제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응원이 됐다. LG 트윈스 오명섭 응원단장은 “관중들의 응원소리가 전율을 줄 때도 있다”며 경기장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전했다.

2000년대 중반 들어 국가대표팀이 각종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면서 여론의 관심을 얻자 가족 단위 관중들과 여성팬들이 큰 폭으로 늘었다. 팬 층이 확대되면서 피켓이나 펼침막 등 창의적인 응원이 활발해졌다. 타석의 선수에게 힘을 주는 선수 각각의 응원가도 등장했다. 매 경기당 서른 곡 가량의 개인 응원가가 구장을 달군다. 이 뿐 아니라 올 시즌에는 야구의 왕이라는 뜻의 별명인 ‘야왕’ 한대화 한화 이글스 감독을 주인공으로 한 인터넷 연재소설 ‘야왕지’가 등장해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경기에 지면 야유를 보내고 쓰레기를 던지던 문화는 이제 찾기 어렵다. 승패에 상관없이 응원을 즐기고 야구 자체를 사랑하는 팬들이 늘면서 응원문화는 한층 성숙해졌다.

2000년: 선수들의 목소리 찾기, 선수협 파동

오랜 시간 동안 우리 프로야구를 사랑해왔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 2000년 프로야구계를 뜨겁게 달궜던 ‘선수협 파동’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2000년 1월 22일 프로야구 선수들은 그들의 오랜 숙원이던 프로야구선수협의회(선수협)을 결성하면서 한국야구위원회(KBO)와 구단에 선수의 권익 보호를 요구했다. 선수협 파동은 선수협을 결성하려는 선수 측과 그를 저지하려는 KBO와 구단 사이의 일련의 알력 다툼을 일컫는다.

1983년 장명부, 김재박 선수 등에 의해 이뤄진 최초의 선수협 결성 시도는 구단의 사전예방으로 불발에 그쳤다. 이후 최동원 선수를 주축으로 88올림픽을 전후해 재시도가 일어났지만 역시 구단의 회유와 압박에 발목이 잡혀 실패했다. 이 사건으로 최동원 선수는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 돼 ‘최동원의 롯데’라고 불렸던 롯데 자이언츠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를 몇 해, 2000년 1월 22일 삼성 라이온즈와 현대 유니콘즈 소속 선수를 제외한 75명의 선수가 참석한 가운데 선수협 첫 창립총회가 열렸다. KBO와 구단들은 선수협 창립총회에 참석한 선수 전원을 무조건 방출하는 데 결의하는 초강수를 뒀다. 프로야구 시즌 진행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던 이러한 1차 선수협 파동은 선수협 창단을 정규 시즌 뒤로 유예하는 것에 합의하면서 일단락됐다. 하지만 정규 시즌 후 이뤄진 재결성 시도에 구단 측이 양준혁, 마해영을 포함한 주도자 6명을 방출하는 것으로 대응하면서 2차 선수협 파동이 불거졌다. 2차 선수협 파동은 이러한 대응에 반발한 선수들이 단체로 선수협 가입에 적극 나서자 결국 KBO가 선수협을 프로야구 공식기구로 인정하면서 마무리됐다. 당시 선수협 파동의 핵심에 있었던 마해영 교수(대경대 스포츠건강과학과)는 “선수협을 구성하려는 움직임은 개인적인 차원의 많은 압박을 이겨낸 끝에 실체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선수들이 이런 진통을 겪으면서도 선수협을 구성하려 했던 것은 연봉협상을 비롯한 계약과 훈련 일체가 구단에 유리하게 짜여있어 선수들이 계속해 구단에 끌려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중의 ‘돈 많은 선수들이 무슨 권리 령이냐’는 인식은 선수 인권 향상을 더욱 지연시켰다. 하지만 일반에 잘 알려진 몇몇 스타 선수의 고액 연봉과는 대조되게 선수의 50% 이상은 3000만 원 이하의 연봉을 받고 있다. 2010년 가구당 연평균 소득이 4360만원인 것을 감안하면 그리 넉넉한 형편이라 할 수 없다.

선수협이 결성된 이후 선수들은 자신의 이러한 상황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 지난 10년 간 선수협은 FA 조건*을 10년에서 8년으로 줄였고, 최저 연봉도 2400만원으로 현실화하는 등 가시적인 성과를 거뒀다. 프로야구선수협의회 김효정 변호사는 “선수협은 선수 입장을 대변해 불합리한 야구 규약을 바꿔나가는 중”이라며 “앞으로는 선수노조를 만들어 보다 적극적으로 선수의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FA(Free Agent): 자유계약선수제. 입단한 팀에서 일정 기간이 지날시 모든 구단과 자유롭게 계약을 체결할 수 있게 된다.

2001년: 첫 일반인 심판, 좁은 길을 뚫고

10번 잘해도 칭찬을 들을 순 없지만 1번 실수해 오심 판정을 하면 비판이 쏟아진다. ‘잘해야 본전’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심판이라는 무거운 자리. 그라운드의 포청천인 그들은 사실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묵묵히 일하고 있을 뿐이다. 심판들은 “직업이 권투선수냐”는 오해를 받을 만큼 이를 꽉 물고 눈에 힘을 줘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그이들의 눈이 한 번 실수를 범하면 돌이킬 수 없는 혼란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프로야구 원년에는 9명의 중앙심판과 프로야구 연고지 6곳의 주재심판 등 15명이 경기의 심판을 맡았다.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주심을 맡은 대한야구협회 김광철 이사는 “개막전은 선수들뿐 아니라 심판도 무척 긴장했던 경기”라며 “밀도 있는 판정을 내리기 위해 개막전 이전 훈련으로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후 심판 수는 점차적으로 늘어 올 시즌에는 1, 2군을 포함해 37명의 심판이 KBO에 등록돼있다.

공정한 판정을 내리기 위해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오심논란은 꾸준히 있어왔다. 스트라이크존 판정이 조금이라도 기아 타이거즈에 유리하게 내려졌다고 생각되는 날에는 어김없이 이 팀의 연고지를 비하해 만든 단어인 ‘홍어존’ 논란이 벌어진다. 지난 6월에는 LG 트윈스 투수의 명백한 보크(주자가 루에 있을 때 투수가 비합법적 투구동작을 하는 것)를 4심 모두 지적하지 않아 한화 이글스와 LG 트윈스의 승패가 엇갈렸다. ‘1·2군 포함 9경기 출장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던 이 경기의 심판들에게 관중들은 ‘차라리 내가 심판하고 만다’며 거세게 항의했다.

그렇다면 과연 일반인도 프로야구 리그에서 심판을 볼 수 있을까? 규정상으로는 분명히 가능하다. KBO에서는 신장 175cm 이상인 자라면 누구나 프로야구 심판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일반인 심판이 프로야구의 문을 두드린 것은 2001년을 제외하고는 없다. 사상 첫 비선수 출신 프로야구 심판이었던 서울시야구연합 엄재국 심판은 줄곧 2군 리그에 서오다 활동 3년 만에 사표를 썼다. 2009년 KBO, 대한야구협회, 국민생활체육야구연합회가 명지전문대학과 손을 잡고 야구심판학교를 출범했지만 현재도 프로야구 1군 리그의 심판은 선수 출신으로만 이뤄져 있다.

현재 한국 프로야구에는 심판 자리가 선수 출신이 은퇴한 후 들어갈 곳이라는 인식이 존재하다보니 심판들의 연공서열 문화가 심하고 이로 인해 권위가 판정에 우선한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일반인 심판의 프로야구 진출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5군에 해당하는 루키리그부터 1군에 해당하는 메이저리그까지 단계적인 육성과정을 통해 실력있는 심판을 길러내는 미국 프로야구에서 전체 심판의 60%는 비선수 출신이다. 비단 선수 출신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공정한 그라운드의 중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011년: 비상하는 국민스포츠, 프로야구

프로야구의 무대가 열린 지 30년. 한국 프로야구는 많은 것이 변했다. 6개 구단으로 출범했던 1982년과는 다르게 현재는 8개 구단(△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 △SK 와이번스 △기아 타이거즈 △두산 베어스 △LG 트윈스 △한화 이글스 △넥센 히어로즈)이 쟁쟁히 실력을 겨루고 있으며, 창원을 연고지로 한 제9구단 NC 다이노스가 창단돼 선수들이 비지땀을 흘리며 훈련하고 있다.

야구장 신축도 진행 중이다. 광주시는 2014년 시즌부터 기아 타이거즈가 새 홈구장을 쓸 수 있도록 계획 중이고, 삼성 라이온즈의 연고지인 대구시는 2015년 시즌을 목표로 공사를 추진 중이다.

어느새 올 시즌 관중 수는 680만 명을 돌파했다. 매번 경기가 치러질 때마다 구장은 쩌렁쩌렁한 응원소리로 뒤덮인다. KBO 홍보팀 관계자는 “지금의 사랑이 반짝 인기가 아니라 꾸준히 이어져 프로야구가 더 단단해지는 초석이 됐으면 한다”고 바람을 전했다. 국민들의 변함없는 애정을 바탕으로 프로야구는 이제 ‘국민 스포츠’로 도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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