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외교학부
서울 시장 선거가 끝났다. 선거가 끝났다는 것은, 자신의 당선이야말로 불행을 끝내고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무책임한 말들을 당분간 듣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오늘날 투표하는 사람들에게 영웅적인 면이 있다면, 그 모든 허황된 약속의 역겨움에도 불구하고 투표장에 가고자 한 결단에 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정치인들의 약속대로 행복과 풍요가 넘실대는 복지사회가 구현되었다고 해보자. SF 작가 어슐러 르 귄의 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며」는 그러한 복지사회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울려 퍼지는 즐거운 종소리가 도시를 휘감고 지나며 달콤한 음악이 되어 들려왔다…….주식시장이나 광고, 비밀경찰, 폭탄도 없었다.” 그뿐이랴. 그곳에 사는 이들은 행복을 어리석은 것이라고 여기는 나쁜 지적 습관조차 없다. 마약을 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기적이로다!”

그런데 오멜라스라는 이름의 이 복지국가는 단 하나의 사회 계약에 기초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이 풍요를 누리되, 단 한명의 아이만은 지하실에서 박약한 상태로 가두어져서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계약이다. 그 아이의 처지를 개선해준다면, 나머지 사람들이 누리는 그 행복을 모두 반납해야 한다. 그 아이에게 친절한 한 마디라도 건네는 순간, 오멜라스의 행복은 사라지게 된다. 그것이 그곳의 ‘현실’이다. 오멜라스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풍요가 바로 그 아이의 비참한 처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오멜라스의 사람들은 그 아이에 대한 연민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들의 무력함을 인정한다. 그리고 무력함을 인정하는 태도로 인해 비로소 그들은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자, 그러면 이 오멜라스 이야기는 이러한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야기는 떠나는 사람들로서 마무리된다. 사람들 중에는 간혹 지하실에서 고통 받는 아이를 보고서 한참 동안 침묵 속에 서 있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침묵 속에 묵묵히 서 있다. 한참을 서 있다. 그리고는, 집에도 들리지 않고, 그 길로 오멜라스를 떠난다. 그들은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고 걸어가고, 걸어가되 혼자 걸어간다. 혼자 걸어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복지국가에서 사라진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가? 어느 절간에서 가서 마음의 위로를 구하는가? 어떤 이들은 절간마저 떠나버린다. 일본의 위대한 만화가 쯔게 요시하루는 절간에서 마저 떠나버린, 그야말로 완전히 ‘증발’해 버린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이처럼 성소에서 마저 사라져버린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정당성을 외부 악과의 비교 속에서 찾는 데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오멜라스에 사는 사람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낫다는 데서 안주하지 않는다. 악이 너무도 뻔뻔할 경우, 그 악의 비판자들은 쉽게 타락하곤 한다. 자신들은 저 정도로 뻔뻔한 악은 아니라는 사실에 쉽게 안도하고, 스스로를 쉽사리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악과 악의 비판자는 일종의 적대적 의존관계에 있다.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때로 악을 요청한다. 상대가 나쁘면 나쁘다고 생각할수록 비판하는 자신은 너무나 쉽게 좋은 사람이 된다.

떠나는 사람들은 그런 쉬운 선이 되길 거부하고 스스로를 유형에 처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진부함으로부터 우리가 구제받는 것은 이러한 비타협적인 사람들을 통해서다. 대학이야말로, 오멜라스에서 사라진 이 비타협적인 이들을 기억하는 곳이기를 나는 바란다. 모든 단체장들, 출마한 사람들, 수상자들, 기획자들, 그 모든 공적인 삶들에 영광 있으라. 그러나 한편, 나의 애정은 또한 스스로 사라져가 버린 사람들에게, 배타적으로, 있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