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남성성, 사회적 구별짓기의 허상

지난 8월 4일, ‘대북사업’을 주도한 한 기업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러나 같은 날, 성적을 비관해 자살한 아들의 뒤를 이어 같은 방식으로 목숨을 끊었던 한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자는 대기업의 경영주로, 후자는 평범한 가장으로 그들의 죽음이 갖는 사회적 의미는 달랐지만 이들이 남긴 유서에서는 가부장으로서 가진 부담감을 읽을 수 있다. 그들은 죽음의 문턱에서조차도 한국사회에서 요구하는 ‘남성다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페미니즘이 사회를 보는 유력한 잣대로 부각돼 여성성에 대한 연구가 이론적 진보를 거듭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문학과사회』의 특집은 ‘남성다움’ 혹은 남성성이 인간 본질에 대한 본래적인 명명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구별짓기에 의해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의 표상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정유성 교수(서강대․교양과정부)는 가정에서 남성이 ‘왕따’로 주변화되고 있는 현상을 사회문화의 맥락에서 설명한다. 한국 남성들은 가족 안에서는 가부장으로 군림하려 하나, 밖에서는 산업화 역군으로 동원되어 늘 가정에 부재하는 허깨비로 전락하게 됐다는 것이다. “세상이 달라지고 사람은 바뀌었는데 이전의 남성성에 매달려 살고 있으니 그 남성들이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며 “남성성은 늘 새롭게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김소영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영상이론과)는 여기서 더 나아가 분단이 지속되는 한국의 역사적 상황에서 남성성이 어떻게 구성돼 왔는지 묻는다. 그는 ‘운명의 손’,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쉬리’로 이어지는 한국 영화의 계보를 그리면서, “한국전쟁 이후 상처입은 남성성은 여성을 상실된 자아로 왜곡하고 그에 처벌을 가하면서도 그와 합일하려 하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만약 한국 사회를 벗어나 보편적인 남성성이 궁금해진다면 홍기령씨(서강대 강사․여성학)의 글을 보자. 그는 고대 바빌론의 창조신화 ‘에누마 엘리시’를 대상으로 심리학적인 접근을 통해 남성성의 신화적 표상들을 분석하고 있다. 바빌론의 창조주이자 남성신인 마르두크가 탄생한 세상은 여신이 만물을 창조한 어머니로 인정받는 공간이다. 홍기령씨는 여기에 융과 프로이트의 견해를 인용해 “생물학적 남성이 느끼는 행복감은 무의식 속의 어머니(여성)를 의식과 통합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문학평론가 심진경의 주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에 나오는 남성을 고찰하며 “이들 소설의 남성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남성다움’만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여성성과 중층적으로 섞여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남성은 독립적이고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상대적이고 유동적인 존재로 재규정되는 것이다.

 

『문학과사회』의 이번 특집을 읽다 보면 “젠더는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적 효과로서만 존재한다”는 주디스 버틀러의 말이 떠오른다. 남성성 역시 여성성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가설에 불과한 대단히 유동적인 젠더 분류에 속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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