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물학(Sociobiology)은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사회적 행동을 다윈의 이론에 입각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사회생물학의 거의 모든 개념이 포함된 E.O.윌슨의 『곤충사회들』(1971)을 그 시초로 본다면 올해는 사회생물학이 탄생한 지 40주년 되는 해이다. 생물학과 사회과학의 만남을 촉진시킨 사회생물학은 이룬 성과만큼이나 학계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고 이에 대응하면서 지금까지도 다양한 형태로 이론을 발전시키고 있다. 사회문화에 대한 생물학적 접근들이 지금까지 어떻게 이뤄졌는지, 그 과정에서 생긴 오해는 없었는지 살펴보고 앞으로의 발전 방향을 검토해본다.
 
비극으로 끝난 첫 만남

진화생물학만큼 갖은 오해, 오용, 비난에 시달린 학문도 없을 것이다. 특히 2차 세계 대전 당시, 다윈의 이론을 인간사회에 무자비하게 오용한 사회다윈주의(Social Darwinism)가 나치 인종정책에 이용되자 더 이상 진화생물학은 사회문화에 대해 이야기조차 할 수 없을 듯 보였다. 사회다윈주의자들이 보기엔 인간 사회 역시 피로 얼룩진 생존경쟁의 장이었고 경쟁에서 이긴 적자(the fittest)만이 ‘자연선택’ 돼 사회가 ‘진보’하는 것이었다. 무자비한 ‘생존경쟁’을 정당화한 사회다윈주의는 결국 이데올로기와 가치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하지만 사회다윈주의자들이 이용했던 ‘자연선택’ 개념은 애초에 다윈이 의도했던 바가 아니었다. 자연선택은 특정 개체가 다른 개체를 짓밟고 일어서는 ‘생존경쟁’의 형태로 일어나지 않는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란 철저하게 무작위적(random), 맹목적인(blind) ‘변화(transformation)’일 뿐이다. 자연선택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개체들 간 ‘변이’가 존재해야 하는데 분자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돌연)변이의 발생 자체가 이미 “완전히 자유로우면서도 맹목적인 순수한 우연(『우연과 필연』)”이다. 자연선택은 해로운 변이를 걸러내고 해가 없는 변이를 통과시키는 단순한 ‘거름망’이 아니다. 오히려 개체의 적응에는 해로워 보이는 변이들이 더 많다. 아주 드문 확률로 생명체의 생존이나 번식을 도와주는 돌연변이가 나타날 때 그것이 개체군 내에 어렵사리 자리를 잡고 점진적으로 누적될 뿐이다. 진화는 특정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진보’가 아니다.

다윈 스스로는 그의 이론을 인간 사회에 적용시키는 데 매우 신중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과학’이 종교적, 정치적 공격대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모든 개체가 자신의 번식을 위해서 행동하도록 진화했다는 개체중심적인 그의 이론으로는 인간사회에 나타나는 ‘고귀한’ 이타적 행위를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생물학으로 인간의 행동과 사회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해보였다. 실제로 이후 인간 사회·문화에 대한 사회과학적 접근들은 인간의 진화적 본능과 같은 생물학적 요소들 이외에 사회·문화적 환경과 그 의미체계로 설명의 초점을 맞춘다. 60년대까지 심리학을 지배했던 행동주의 심리학은 인간 행동을 오직 바깥 세계에서의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만 봤으며, 사회학자들 역시 인간행위의 사회·문화적 의미와 사회적 사실들(규범, 제도 등)에 주목했다. ‘추접한’ 생물학적 요소들로 사회문화를 설명하기엔 인간이 너무 ‘고귀’해 보였던 것이다.

'유전자의 관점'으로 성사된 두번째 만남= 그러나 생물학은 계속 발전해 나갔다. 6, 70년대에 이르자 진화생물학은 DNA 구조와 복제양식을 발견한 분자생물학, 뇌의 물리적 상태를 탐구한 신경심리학 등과 종합되면서 다시 한 번 생물학과 사회과학의 만남을 성사시킨다. ‘유전자의 관점’을 장착한 진화생물학은 인간의 사회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여지가 확장됐고 이 과정에서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이 태동한다.

1975년 윌슨의 『사회생물학-새로운 종합』의 출간과 함께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사회생물학은 윌리엄 해밀턴의 포괄 적합도 개념(1960년대 중반)을 핵심적인 이론적 토대로 두고 있다. 포괄 적합도 이론 혹은 친족 선택 이론은 다윈이 개체 수준에서 설명할 수 없었던 이타적 행위를 유전자 수준에서 설명 가능하게 해줬다. 포괄 적합도 이론에 따르면 이타적 행동은 유전적으로 가까운 사이일수록 진화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유전자는 자신의 유전자를 직접 갖고 있는 개체뿐 아니라 계통적으로 동일한 유전자를 간접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다른 개체(친척) 역시 고려해야 되고, 따라서 유전자에겐 자신의 보존을 위한 ‘이기적’인 행동이 인간에겐 ‘이타적’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해밀턴의 예측대로 협동을 유도하는 유전자 csaA가 아메바에서 발견됐고, 효모에서도 발견됐다.

비혈연자들 간 이타주의는 ‘호혜적 이타주의’로 설명된다. 해밀턴의 작업에 기초해 로버트 트리버스가 입증한 호혜적 이타주의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은 자는 이를 기억해서 다시 호의를 제공하는 팃포탯(tit-for-tat) 전략의 이타주의이다. 트리버스는 게임이론을 이용해서 호혜적 이타주의를 설명했고 컴퓨터 모의실험에 의해 이러한 형태의 협동이 진화할 수 있음이 밝혀졌다.

이처럼 개체 수준에서 설명할 수 없었던 이타적 행위가 자신의 복사체들을 퍼뜨리기 위한 ‘이기적’ 유전자의 수준에서 설명 가능해지자 많은 사회행동들이 일순 설명 가능해졌다. ‘유전자의 관점’을 바탕으로 사회생물학은 인간의 공격성, 성적 행동, 이타주의, 종교 등을 설명하고자 시도한다. 그런데 윌슨은 다소 성급한 결론을 이끌어낸다. 『사회생물학』 마지막 장에서 그는 인간의 행동도 궁극적으로는 유전자의 불가피한 표현이기 때문에 인간의 제도, 종교, 문화, 도덕적 판단도 유전자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봉사하며 이 점을 고려하지 못한 인문학, 사회과학은 결국 사회생물학의 하위 분과로 편입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많은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모든 것이 유전적으로 결정돼 있다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아웅다웅 살아가는가. 도덕적 판단과 같은 가치판단마저 그러하다면 결정을 하는 ‘나’는 무엇이고 자유의지는 없단 말인가.

다시 시작된 공격, 그러나

당연히 사회생물학자들은 윌슨과 더불어서 엄청난 비난과 반발에 직면한다. 실제로 윌슨은 학술대회 강단에서 물세례를 맞거나 학생들의 퇴위 시위에 시달리기도 한다. 가장 극심한 비난은 사회생물학이 ‘유전자 결정론’과 ‘환원주의’에 빠져 과거 사회다윈주의의 악령을 다시 불러일으키려 한다는 것이다. 특히 르원틴을 비롯해 스티븐 굴드 등이 속한 ‘사회생물학 연구회(The Sociobiology Study Group)’는 사회생물학을 비판하는 데 앞장선다. 이들에 따르면 사회생물학은 모든 것을 이미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현 사회 구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이다. 물론 윌슨의 억측성 발언과 일관되지 못한 이론 체계는 현재 관점에서 보면 분명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고 평가 받는다. 하지만 윌슨과 르원틴-굴드 간의 논쟁을 분석한 시거스트롤에 의하면 르원틴은 논쟁을 이념의 문제로 끌고 가 불평만 늘어놓은 학자로 추락하고 말았으며 사회생물학 전반에 지나치게 가혹하고 감정적인 비판을 가했다고 파악한다.

대부분 사회생물학자 또는 현대 진화생물학자들은 그들이 비난받았던 것과 같이 유전자 결정론자가 아니다. 특히 도킨스는 사회생물학자들이 필연적으로 유전자 결정론을 믿는다는 비판에 대해 “그냥 거짓말일 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유전자 결정론이란 인간의 모든 겉모습, 행동, 질병 및 기질은 유전자에 의해 인과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인데, 도킨스와 현대 진화생물학자들에게 유전자는 유전 가능한 표현형(phenotype, 한 개체가 발달하면서 생기는 형태와 생리, 행동)을 표출한다고 여겨지는 염색체의 특정 양에 불과하며, 그 양을 정하는 분자생물학 수준의 결정된 유일한 방식은 없다. 특정 개체와 관련한 표현형 P에 대해 일대일로 대응되는 유전자 a가 필요충분조건으로 제시되지 않는 것이다. 유전자의 영향은 확률적일 뿐이다.  따라서 최근 사회생물학 혹은 진화생물학자들의 접근법은 유전자 결정론이나 윌슨의 주장에서 나타나는 의미에서의 생물학적 환원주의, 즉 모든 인간의 사회문화적 현상을 생물학적 현상으로 남김없이 환원시키는 시도로 봐서는 안 된다. 다만 유전자의 수준에서 이를 매개로 설명을 해나가는 방법론적인 의미에서 ‘유전자 환원주의’로 이해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장대익 교수(자유전공학부)는 “환원주의와 결정론은 서로 다른 논제”라며 “유전자 환원주의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반드시 결정론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오는 11일(금) “사회생물학 논쟁에 대한 소견”이란 제목으로 집담회를 여는 김세균 교수(정치학과) 역시 유전자 결정론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생물학적 환원주의’는 단호하게 배격해야한다고 본다.

사회과학도 문제는 있다

오히려 ‘환원주의’와 관련한 문제점은 역으로 사회과학 진영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인류학을 포함해 기존 사회과학 전통에서는 인간에 내재한 선천적인 생물학적 요인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사회문화적 환경은 개인에 외재하면서 인간행동을 결정하고 생물학적 요인은 인간 행동과 관계가 없으며, 인간 정신은 ‘빈 서판(blank slate)’과 같다는 것이다. “개인의 본성은 사회적 요소에 의해 형성되고 변형되는 부정형의 재료에 불과하다”고 본 사회학자 뒤르켐의 언명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사회는 하나의 유기적 실체(초유기체)이며 개인들을 사회구조의 ‘담지자’ 또는 ‘지원자’로 간주한 사회과학적 전통은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 뒤르켐, 레비스트로스, 알튀세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진화생물학자이자 진화심리학자인 존 투비와 레다 코스미디스는 이를 표준사회과학모델(Standard Social Science Model, SSSM)로 명명하고 이를 ‘사회학적 환원주의’라고 비판한다.(진화생물학이 유전자 환원주의로 비난받았음을 상기하라.) 이들이 보기에 SSSM은 생물학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을 배타적으로 구분함으로써 인간에 선천적으로 내재된 진화 기제들을 무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의 뇌는 다른 사람의 믿음과 의도를 분별하는 학습 장치를 갖추도록 진화했다. 진화생물학자들에 따르면 문화적 학습은 선천적인 심리적 장비에 의존하고 있고 이는 어린 시절부터 출현해서 가동한다. 정상적인 아이는 어른에 의해 최초로 “저건 토마야”라는 말에 노출되면 그것을 자신이 보고 있는 장난감의 이름이 아니라 그 순간 어른이 보고 있는 장난감의 이름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유전적 뿌리가 강한 신경학적 장애를 가진 자폐증 아이들은 다른 사람의 믿음과 의도를 분별하는 학습 장치를 갖추지 못해, 모방과 언어 학습을 하긴 하지만 학습방식이 이상해진다. 실제로 자폐증을 앓고 있는 어린이를 실험해 본 결과 어머니가 유리컵을 쓰러뜨린 후 “어머나, 이런!”이라고 말하면, ‘어머나, 이런’을 쓰러진 그 유리컵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다. 이는 저능의 결과도 아니다. 왜냐하면 자폐증이 없는 지체 어린이들은 언어와 모방에 대해 자폐증 아이들과 같은 약점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SSSM 모델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빈 서판’이기에 교화, 학습 등에 의해 인간의 행동은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폭력성, 범죄행위 등도 교화를 거치면 남을 해치거나 파괴하는 능력을 잃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해 교화 이론이 제기된다. 그러나 스티븐 핑커 교수는 이는 ‘도덕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도덕주의적 오류란 어떠해야 한다(ought)는 당위로부터 실제로 어떠하다(is)는 사실을 이끌어내는 것으로, 교화 이론은 교화할 수 ‘있어야 한다’가 실제로 교화‘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SSSM에 대한 진화생물학자들의 비판은 실제 사회과학 모델에 비해 다소 희화화돼 있다는 평을 받긴 하지만 김환석 교수(국민대 사회학과)는 “기존 사회과학의 전통이 지닌 어떤 편향성을 성찰해보기 위해서 음미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말한다. 

만남은 아직, '진화'는 계속

최근의 많은 진화생물학자들은 유전적, 진화적 요소와 함께 사회·문화적 환경요인을 충분히 인정함으로써 인간사회·문화에 대한 설명모델들을 제시해 나가고 있다.

유전자로의 존재론적 환원주의에는 반대한 도킨스는 문화 전달의 단위로 유전자에 상응하는 독립적인 존재자 밈(meme)을 통해 문화를 설명한다.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밈학은 문화를 독립적인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 영역으로 본다. 최근까지도 도킨스는 종교를 정신 바이러스의 일종으로 분석한 사례를 보여주는 등 밈학을 그의 ‘이기적 유전자' 이론과 일관된 체계로서 발전시켜 가고 있다.

유전자와 문화 간의 상호작용을 강조한 보이드와 리처슨의 이중 대물림 이론도 주목받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유전적 진화가 문화적 진화를 낳지만, 역으로 문화적 진화도 개체군 내의 유전자 빈도를 변화시키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고기를 불에 익혀 먹는 관습은 사회적 학습에 의해 전파되지만, 익힌 고기가 흔한 환경이 되자 창자의 길이를 줄이고 치아를 덜 견고하게 해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는 유전자가 자연선택 된다.

이중 대물림 이론과 유사하지만 환경적 요소와 함께 인간의 ‘마음’을 강조한 진화심리학도 1980년대 말부터 등장해 학계에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진화적 조상이 수백만년에 걸쳐 봉착했던 적응적 문제들을 해결하게끔 자연선택에 의해 설계된 수많은 영역-특이적인 심리 기제들의 묶음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본다. 마치 신체가 적응적인 여러 기관(눈, 다리, 심장 등)으로 구성되듯, 인간의 마음도 하나의 특수한 적응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일련의 규칙들이 장착된 ‘정신기관(mental organ)’인 것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전통적인 사회과학 모델이 말하는 문화의 차이를 전달(transmission)과 유발(evocation)이라는 각기 다른 요인들에 의해 설명한다. 첫째, 어떤 문화적 변이는 사회적 학습이나 모방을 통해 개체군 사이에 ‘전달’된다. 카누 제작법, 농사짓는 지식의 누적과 전파는 ‘전달된 문화’로 설명된다. 둘째, 보편적인 심리 기제에 상이한 환경 정보들이 입력돼 상이한 결과를 ‘유발’한다. 예를 들어 진화심리학자들은 감정을 설명할 때 모든 사람에게 “이프-덴(If-then) 공식”이라 불리는 마음 메커니즘이 있다고 파악한다. 즉 자신의 권익이나 존엄성이 모욕당하면(If) 그 반응으로서(then) 불쾌하고 격한 감정을 ‘유발’하는 선천적 심리 기제(프로그램)가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이 모욕으로 간주되고, 어떤 반응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지는 각 문화권의 환경에 달려 있지만, 입력과 유발을 가능케 하는 심리 메커니즘 자체는 보편적으로 마음에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회문화적 환경과 진화된 마음을 함께 고려함으로써 진화심리학자들은 생물학/사회과학의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전중환 교수(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는 진화심리학과 관련해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를 다윈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통합함으로써 사회과학의 진화적 종합을 성취할 날이 점차 가깝게 다가오고 있다”고 파악한다.

유전자 결정론이자 지나친 환원주의라는 비판과 부정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은 진화론적 인식을 대중들에게 널리 인지시켰을 뿐 아니라, 사회과학과의 진정한 만남을 향해 가고 있다. 다만 이 만남이 계속 이어질지, 어떤 관계로 맺어질지, 혹은 또 다시 끝나버릴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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