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는 소유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고, 또 실제로 누군가를 소유하는 것 자체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머릿속의 어둡고 축축한 한 구석에서는 소유하라고 계속해서 명령하고 있다. 원래 욕망이란 불가능한 것을 계속해서 원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소유욕은 갈 곳을 잃고 머릿속을 맴돌다가 엉뚱한 대상에 치환돼 붙어버린다. 이른바 ‘수집’과 ‘취미’라는 것 말이다.
하지만 치환된 욕망이 대개 그렇듯 그것은 어떤 만족한 상태에 도달하지 못하고 항상 불완전 연소된 욕망으로 남아있게 된다. 안타까운 것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애꿎게 수집돼버린 그 물건들의 운명이다. 포장도 벗겨지지 않은 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먼지와 대화를 나누는 이 시대의 많은 물건들은 우리 욕망의 해소되지 못한 잔여물의 속박을 그대로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다. 신기한 것은 이런 수집광 증세가 연애 시작 후 혹은 결혼 후에는 어느 정도 완화된 증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실례로 우표와 팝 LP의 수집광이던 나의 막내 삼촌은 결혼 이후에는 단 한 장의 우표도, LP도 사지 않았다. 한정된 자본 때문인지 혹은 치환되어버린 욕망이 갈구하던 대상을 찾아 그대로 고착돼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문제는 연애 상대나 배우자는 여러분이 수집한 그 흔적들을 상당히 싫어한다는 점이다. 그건 아마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 상대방의 심리상태를 백지로 만들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내 연애 상대가 수집벽을 가졌을 경우, 복잡하고 엉켜버린 과거를 그러한 수집물이 증명해주고 있어 이를 견디기 힘들어한다는 것이다. 그 수집물 속에는 과거의 감정들이 말라붙은 껌 딱지처럼 떨어지지 않고, 흉함을 그대로 드러낸 채 붙어있지 않은가. 그래서 어쩌면 서른을 넘긴 후 만나는 사람끼리는 그런 소유욕을 감춘 채 결혼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당신이 어떤 과거를 지녔던 간에 모두 허용할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왜냐하면 나의 소유욕도 너의 것에 비해 뒤쳐지지 않고, 또한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라서.
그런데 한 가지 씁쓸한 것은, 모두들 과거에 그러한 욕망의 치환을 한 차례 이상 경험해 봤기에 그 쓸쓸한 수집의 과거를 떠올리며 다른 대상으로 아주 손쉽게 기차를 갈아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체념을 이미 내면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음반점이나 서점에서 만나는 구부정한 어깨들을 보면 조금은 안쓰럽고 가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어진다. 소주 한 잔 후에 이런 욕망의 치환이 불러낸 쓸쓸한 과거를 절절한 신파로 꾸며내는 재주도 우리는 이미 터득해 놓지 않았던가.
대학신문
snupress@snu.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