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가 음악의 시대라면 1990년대는 영화의 시대였다. 영화를 좋아하던 젊은이들은 평론가 정성일의 글을 열독하곤 했었다. 허세 속에 잡지 『키노』를 들고 다녔지만 이해하기 버거웠던 나는 늦은 밤 정은임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통해 위로를 받곤 했다. 영화를 지식이 아니라 애정으로 대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그녀를 통해 현실 그 이상의 것들을 접할 수 있었고 꿈 꿀 수 있었다.

배우 리버 피닉스를 아꼈던 그녀는 그가 죽던 날 울먹이며 영화 『허공에의 질주』를 소개했다. 리버 피닉스는 베트남전 반대 운동으로 인해 FBI에게 20여년간 쫓기고 있는 부모를 둔 10대 청소년으로 등장한다. 평범한 성장영화로도 볼 수 있지만, 60년대 젊은이들이 추구했던 가치 그리고 그것이 부정되고 단절된 이후의 허무함이 어렴풋이 묻어있었다.

영화의 배경인 80년대 이후, 미국은 신자유주의의 자신감과 열정으로 가득했다. 급진적 자유를 꿈꾸었던 히피들의 일탈까지도 세련되게 포섭하면서, 신자유주의는 새로운 지구를 만들었고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었다. 영화 『귀여운 여인』에서 리처드 기어는 주주이익을 위해 조선소를 분할매각하려 하고, 전세계인들은 줄리아 로버츠의 쇼핑장면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봤다. 그렇게,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의 영향력이 미약한 ‘미국 예외주의’의 특성들은 더욱 견고해지는 듯 했다.

그러나 요즘 ‘미국 예외주의’가 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있다. 9월부터 시작된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은 현재까지도 “1%에 맞선 99%의 투쟁”을 보여주고 있다, 점령운동은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하여, 거대 은행의 계좌를 없애는 ‘은행 옮기는’ 운동이 전개되고 오클랜드에서는 ‘도시 총파업’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 속에서 미국의 젊은이들과 노동운동 그리고 공공성과 연대의 가치는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자유를 신봉하는 미국인들이 자유주의를 통해서는 자신들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규제하지 않고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음을, 1%만이 자유로울 수 있음을 자신의 삶을 통해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광장에서의 만남을 통해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일지도 모른다. 한미 FTA가 체결된다면, 국민이 어찌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입법부와 행정부의 권한을 뛰어넘게 될 것이다. 통제되지 않는 권력은 우리에게 민주주의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되묻게 될 것이다.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서 안철수 교수의 편지는 로자 파크스를 언급하며 투표의 중요성을 호소했다. 그러나 의회를 통한 민주주의가 국민 주권을 소멸시키려는 시도를 막아낼 수 없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광장의 민주주의가 아닐까. 로자 파크스는 투표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흑인 시민권 운동을 촉발시켰기 때문에 기억되어야 하는 존재일 것이다. ‘좋은’ 투표의 그 시절, 크레인 위의 김주익이 결국 내려오지 못했음을 정은임은 외롭게 애도해야 했다. 그러나 김진숙은 땅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그녀가 광장에 있었고 또한 우리가 광장에 있었기 때문임을 기억하자.

김경근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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