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중국의 부상과 한반도의 미래』저자 정재호 교수(정치외교학부)

고려시대에 한 문신이 있었다. 그는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 온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화친조약을 맺었다. 당초 고려에서는 서경 이북 땅을 넘기고 전쟁을 끝내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송나라와의 전투를 이기고 파죽지세로 고려 땅에 들어온 소손녕을 상대로 한 담판에서 땅을 빼앗기기는커녕 오히려 송나라와의 단교를 조건으로 압록강 동쪽 지역 땅을 얻어냈다. 국제 정세를 읽어내는 뛰어난 외교적 판단이 요청될 때마다 한국인들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서희의 이야기다. 현재 패권국인 미국의 아성에 저항할 만큼 급부상한 중국 사이에 놓인 한국의 상황은 송나라와 요나라 사이에 놓였던 고려시대의 국제 정세와 자못 비슷하다. 지난 8월 출간된 『중국의 부상과 한반도의 미래』에서 한중 관계 전문가 정재호 교수(정치외교학부)는 한국이 두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겪게 될 전략적 딜레마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제2, 제3의 서희와 같은 외교를 펼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가하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정 교수가 제안하는 것은 그가 직접 조어한 ‘명민외교’(明敏外交)다. 정 교수에 따르면 ‘명민외교’는 말 그대로 ‘명석한 이해와 준비에 바탕을 두되 민활한 대처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외교’를 뜻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타국과의 관계가 ‘어쨌든 잘 풀릴 것이다’라는 안일한 태도의 낙관론을 경계하고 신중론에 의거해 문제 발생 시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응할지 경우에 따른 시나리오를 사전에 대비해야 한다. 또 지금까지 한국 외교사에서 빈번하게 나타났던 ‘상황’에 따른 임기응변적 대처에서 ‘현안’마다 원칙을 마련해 그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의식 제고와 일관된 입장을 취할 수 있도록 외교 인적 자원 구성을 재편해야 한다.

사진: 하태승 기자 gkxotmd@snu.kr


다음은 정 교수와의 일문일답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책은 ‘중국의 부상’을 전제하고 있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중국의 부상을 주장하는 첫 번째 근거는 중국의 높은 경제 성장률이다. 전 세계를 강타한 경제 위기 속에서도 중국은 여전히 높은 경제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1978년에서 금융 위기가 발발한 2007년까지 중국은 연평균 10%에 달하는 고성장을 지속적으로 이뤄냈고 이후에도 여전히 높은 성장률을 구가하고 있다. 2010년에는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GDP 절대액 기준) 부상했다.

두 번째 근거는 발전의 내재적 논리다. 수출에 의존한 국가의 경제 성장은 정체될 수 있지만 중국의 경우에는 자생적 경쟁력을 무시할 수 없다. 13억 인구를 가진 중국에서 단 10%만 구매력을 발휘하더라도 중국 시장은 건재할 수 있다. 사회적 인프라를 구축하고 잠재 구매자를 늘려 미국의 내재적 발전에 동력이 됐던 서부로의 ‘골드 러시’(gold rush)처럼 중국이 서부, 동북, 서남 개발을 통해 지속적인 성장의 지역적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세 번째로 지난 30년간 중국이 보여주고 있는 학습효과다. 1980년대 중반까지 중국은 세계의 공장을 자임했다. 개방 초기 값싼 노동력을 활용해 노동집약적 산업분야의 기술을 습득하고 2000년대부터는 외국에 산재한 저평가된 기업을 적극적으로 매수하면서 선진 기술을 획득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연구와 교육에 대한 획기적인 투자는 향후 중국의 지속적인 성장 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중국이 아무런 도전이나 문제에 직면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속도에 차이가 있을 뿐 적어도 중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한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명민외교’는 점차 부상하는 전략적 동반자로서의 중국과 군사적 동맹국인 미국 사이에서 한국이 취할 외교적 입장에 대한 제언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는 1880년 청나라 사신 황쭌센이 『조선책략』에서 언급한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의 전략처럼 국제 관계에서 한국의 좌표에 대한 상세하고 구체적인 입장이라기보다, 당위적이고 원론적 접근법의 성격이 강한 것 같다

명민외교’가 향후 한국이 취할 특정한 행동 지침이 아니라 외교 정책 수립 과정에서의 방법과 같은 원론적 접근법의 성격을 갖는 이유는 한국이 국제 정치의 규범과 구조를 만들어내는 독립변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 중국과 같은 독립변수 국가가 구체적으로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를 설정할 때 그 선택은 국제 관계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한국의 선택은 어느 정도 두 강대국의 선택에 종속돼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외려 한국이 어떤 특정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주장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 외교는 기본적으로 말이 너무 많다. 특히 추이를 더 지켜보고 선택해야 하는 외교적 사항들에 대해 한국 정치인들은 지나치게 앞서 발언하는 경향이 있다.

‘명민외교’는 한미 동맹처럼 한국이 지속적으로 입장을 보여 왔던 사안에 일관성을 획득하는 것과 더불어 통일 이후 미국과의 관계와 같은 부분에서는 ‘전략적 모호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일관성에 대해서는 양 강대국의 구도 속에서 자생적으로 호흡의 공간을 창출하고 있는 싱가폴의 사례를 주시할 만하다. 1994년 미국 국적의 마이클 페이는 싱가폴에서 절도와 기물파손죄로 태형을 받았다. 이는 당시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친서를 보내 양해를 구할 만큼 민감한 사안으로 비화됐지만 싱가폴 정부는 결국 마이클 페이에게 태형을 실시했다. 싱가폴에게 미국이 확실한 우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은 자국의 가치 수호라는 현안에 대한 일관적 입장을 표방한 것이었다.

‘명민 외교’의 또 다른 시사점은 이러한 일관된 외교적 입장이 진정 한국적 국익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구성돼야 한다고 지적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한국적 국익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나라에서 국익은 크게 번영, 안보, 비전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번영은 경제적 풍요를 말한다. 안보는 자주 방위력의 증진과 같은 군사력의 안정이 될 것이고 한국에 특수하게 적용되는 비전은 통일이다.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많은 나라들은 이 세 가지 중에서 번영을 이루는 것도 벅찬 경우가 많다. 그러한 국가들과는 대조적으로 중형 강국으로서 한국은 이 세 가지에 대해 두루 국익의 측면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국익은 지나치게 경제적 번영에 치우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경제적 측면도 경시할 수 없지만 무역 수지 흑자와 같은 단순한 수량적 지표보다 국제 사회가 바라보는 한국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연평도 사건은 60만 규모의 군대를 보유한 나라로서는 위신이 서지 않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일본 해군이나 중국 해군이 우리나라의 군사력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지에 대해 미리 고려하는 것도 충분히 외교적 대비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에 대한 인식과 기억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을 뿐더러 한번 만들어지면 바꾸기도 쉽지 않다. 경제적 국익에 경도된 한국의 ‘국익 개념’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던졌다고 생각한다.

향후 계획하고 있는 연구 주제는 무엇인가

중국은 유례없이 다양한 제국의 역사를 가진 국가다. 중국 역사 속에서 서너 차례 부상과 쇠퇴를 반복했던 역대 제국들의 특질을 비교하는 연구를 할 예정이다. 거시적 주제지만 흥미로운 연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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