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나온 책] 『붓다를 죽인 부처』

박노자 지음ㅣ인물과사상사ㅣ288쪽ㅣ1만4천원
‘부처’가 ‘붓다’를 죽였다? 책을 들자마자 생긴 의아스럽기 그지없는 첫 물음이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의 일반적 호칭은 ‘붓다’이며, 중국에서는 ‘불타(佛陀)’라 불렀고, 우리나라에 와서는 ‘부처’가 됐다. 결국 붓다는 부처의 원형인 것. 얼핏 보면 붓다가 자기 자신을 죽였다는 충격적인 소리다. 저자가 말하고자 한 ‘붓다’와 ‘부처’의 차이는 무엇일까. 제목이 던진 의문의 해답을 찾는 과정이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한다.

저자 박노자 교수(노르웨이 오슬로대 한국학과)는 한국에 귀화한 러시아 태생의 불신도다. ‘이방인’의 시선으로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파헤친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펴냈던 그가 이번에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한국 불교계다.

저자는 현재의 한국 불교계가 지극히 개인 중심적이고 보수적이며 현실 순응적이라고 비판한다. 예컨대 신도들은 ‘기도발’이 잘 먹히는 신통력 좋은 사찰로 가서 지극히 개인적인 구복 기도를 한다. 돈이 되는 기도처를 두고 유혈 충돌을 빚는 불교계의 파벌 싸움 소식 역시 심심찮게 들려온다. 또 저자는 불교계 내에 뿌리 깊게 자리잡힌 은사와 제자 간 위계 질서와 문중 중심의 패거리주의가 불자들 간의 진정한 소통을 막고 있다고 지적한다. 불교 의식 집전자의 자격을 갖춘 고승들 앞에서 그의 제자들은 자타불이(自他不異)라는 교리가 무색할 정도로 앞다투어 ‘받들고 모심(侍奉)’을 행하고, 이 시봉의 대가로 사찰을 물려받거나 윤번으로 주지직을 맡는 등의 문제가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병폐를 극복하기 위해 저자가 제시한 대안은 다름 아닌 ‘초기 불교’다. 그에 따르면 초기 불교에서는 자(自)와 타(他)를 고정되고 구분된 것으로 보지 않았다. 눈 앞의 세계는 모두 우리가 번뇌로 인해 착각한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남 또는 사회의 고통과 번뇌는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 타인에게 닥친 문제를 사회의 사람들이 단순히 ‘개인의 일’로 치부하고 넘어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 저자는 초기 불교가 민주주의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언급한다. 초기에는 붓다나 수행자 모두 어떠한 계급적 지위나 권위도 갖지 않았으며 불교는 ‘평등한 수행자들의 공동체’였다는 것이다. 박노자 교수는 오늘날 한국 불교의 권위주의가 상하 간 활발한 토론을 통해 권위주의를 타파하려 했던 초기 불교와 정반대라고 비판한다.

저자는 이러한 초기 불교의 모습이 시간이 흐르면서 왜곡됐음에 주목한다. 현실에서 도술이나 미신이 일반 민중에게 파급력을 가지게 됐고 이로 인해 사찰은 ‘더 큰 불상’에 집착하는 등의 폐단을 보이게 됐다. 그리고 진정한 존경심에 기반을 둔 질서는 일반 민중을 효과적으로 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불교계가 불가피하게 섬김의 예를 만들어냈는데, 이 점이 오늘날에 와서는 권위주의적 태도를 낳게 됐다는 것이다. 결국 현재 이러한 불교의 폐단을 상징하는 ‘부처’를 타파하고 ‘붓다’로 표현되는 초기 순수 불교 교리를 추구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진보적 불교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하지만 현대 한국 사회에서 초기 불교 원형을 회복하자는 저자의 주장은 비현실적이지 않을까. 저자 역시 인정하듯 초기 불교의 교리도 완벽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진정한 해방을 외쳤지만 여성의 몸을 어쩔 수 없는 열등한 상태로 보는 등 당대의 모순적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점도 발견된다. 그러나 지금의 불교 사회에서 ‘옛날로 돌아가 근본을 찾자’는 단순한 주장이 마치 금기를 건드린 것 같은 과감한 도전으로 비춰지는 것은 그만큼 뿌리 깊은 불교계의 폐단의 반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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