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 미셸 우엘벡,『소립자』

미셸 우엘백 지음ㅣ이세욱 옮김ㅣ열린책들ㅣ350쪽ㅣ9천8백원

좋아할 수 없는 작가를 읽을 필요가 있을까? 아무래도 동의할 수 없는 작가,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세계관과 감수성의 작가를? 글쎄.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한 시인의 시구는 단지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만 읽기에도 인생은 충분히 짧을 테니까.

하지만 『소립자』의 작가 미셸 우엘벡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듯이 내게도) 아무래도 동의할 수 없는 작가, 수긍하기 어려운 세계관과 감수성의 작가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의 충성스러운 독자이기도 하다. 우엘벡이 누구인가? 1958년생, 보수적 정치성향에 극단주의자, 쓰는 글마다 센세이션을 몰고 다니는 도발적 싸움꾼. 프랑스 태생이지만 테러위협 때문에 현재 아일랜드에 거주 중. 그뿐인가?

소위 ‘캐비어 좌파’(우리 식 표현으로는 ‘강남 좌파’)의 대표자 격인 베르나르 앙리 레비와의 서신교환집 『공공의 적들』에서 우엘벡은 자기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나는 허무주의자에다 반동적인 인물이며, 냉소적인 사람인 동시에 인종차별주의자에 여성 혐오론자입니다. ‘우파 아나키스트’라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한 부류에 나를 포함시킨다면, 그건 내게 큰 영광일 것입니다.”

이 자기소개는 물론 비판가들의 비난문구를 따온 것이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반어나 위악인 것은 아니다. 그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주장한다. 그는 좌파들의 정치적 이상향이 망상이라고 생각하며, 이 세계가 약육강식의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하며, 인간의 자유 같은 것은 변태적 섹스의 토양일 뿐이라는 식으로 생각한다. 이슬람은 ‘엿 같은’ 종교라고 선언하고(이것이 앞서 말한 테러위협의 원인이라고 한다), 인간이라는 종을 쓸어버리고 새로운 종을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을 위해 SF의 형식까지 빌어온다.

이런 극단적 주장들은 68혁명 이후 서구적 자유주의가 빈사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우엘벡은 서구사회에서 사랑은 더 이상 불가능하며, 이 난관을 극복할 방법은 인간이라는 종의 소멸과 새로운 종의 탄생 이외에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물론 특유의 냉소적이며 비관적인 우화이지만, 『소립자』를 보면 이런 것들이 얼마나 뿌리 깊게 그의 사유를 지배하고 있는지 이해하게 된다. 그에게 더 이상 ‘가치’나 새로운 ‘체계’, 또는 인간사회를 이끌어갈 ‘주인기표’는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된다. 지젝을 비롯한 좌파 철학자들이 우엘벡을 (‘주인기표’가 상실된) 포스트모던 사회의 ‘정신적 부유물’로 보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의 첫 소설 『투쟁영역의 확대』가 나온 것은 1994년이고, 그의 출세작 『소립자』가 출간된 것은 1998년이다. 『소립자』에서 우엘벡은 상반되는 두 인물(아버지가 다른 형제)을 그려 보인다. 브뤼노는 동물적 본능에 충실한 인간이다. 그에게는 이성적 능력이 결여돼 있다. 그의 방탕한 ‘성적 자유’는 서구식 자유주의가 얼마나 기형화됐는지를 알려주는 샘플이다. 반대로 미셸은 이성적 연산의 정확성을 선호하는 인간이다. 그의 삶에는 생명의 약동이 철저히 배제돼 있다. 말하자면 브뤼노가 아무런 제어장치 없이 섹스에 탐닉할 때, 미셸은 아무런 내적 동기 없이 DNA 연구에 몰두하는 식이다. 그들의 최후가 행복할 리 없다. 브뤼노는 방탕한 성적 탐닉 끝에 죽고, 미셸은 연구 성과를 남긴 뒤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실종된다. 브뤼노가 방향타를 잃은 서구사회의 비극적 최후를 암시한다면, 미셸은 그 비극 앞에서 냉소적 비관에 빠진 인물을 연기한다.

『소립자』는 (겨우 소설 한 권에 대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비판과 비난을 초래했다고 한다. 이 소설이 68세대의 가치, 즉 자유와 개인이라는 가치를 맹렬히 공격하고 있다는 점, 서구 사회의 ‘부재하는 사랑’을 ‘신자연주의’라고 할 만한 냉정함으로 그렸다는 점, 종교적 인종적 편견을 등장인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떠들어댄다는 점 등이 비난의 핵심이었다. 실제로 우엘벡의 소설들은 좌파적 정치성은 물론이고, 진보적 자유주의와 해체주의 등에 대해서도 무차별적인 적의를 드러낸다.

쿤데라나 키냐르의 소설처럼, 우엘벡의 소설은 에세이적이다. 하지만 그의 에세이는 쿤데라적 품격이나 키냐르적 우아함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의 문장들은 직설적 사회평론과 철학적, 과학적, 문예학적 논설들로 직진해서 거기서 뒹군다. 그는 소설을 통해 이 세계를 ‘보여주지’ 않고, 이 세계를 ‘논한다’. 그러면 안 되는 걸까? 설마.

소설 속에서 우엘벡은, “발자크, 플로베르, 보들레르, 도스토옙스키 등 위대한 작가 치고 반동분자 아닌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그것이 자신을 염두에 둔 코멘트임은 물론이다.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우엘벡의 비난은 때로 ‘극우적’이라는 평판까지 불러온다. 그러나 소설의 형상으로 표현된 그 질문들은 혐오만 하고 끝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대결’이 필요한 논쟁적 질문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작가에 대한 혐오를 ‘충분히’ 통과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좋아하지 않는 작가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의 세계관과 감수성에 동의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를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가 우리 외부의 적인지, 아니면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적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이 작가에 대한 혐오가 어쩌면 우리 자신에 대한 혐오는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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