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화)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가 중학교 역사교육과정 및 집필기준 개정안을 확정 고시한 후 역사학계와 시민단체의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역사교육과정개발추진위원회(역추위) 위원 21명 중 9명이 항의의 의미로 사퇴했으며 전국역사학대회에서는 이념과 분야를 초월한 11개 학회들이 공동 성명서를 통해 교과부의 독단적 결정을 비판했다. 대부분 언론에서는 이 사태를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둘러싼 이념적 갈등으로 보도하고 있지만 이념이나 용어는 사실 부차적인 문제다. 이 사태가 지닌 가장 중요한 의미는 정권의 입맛에 따라 역사교과서를 수정하는 선례를 남길 수 있다는 점이다.

이주호 교과부 장관과 이배용 역추위 위원장은 법적인 결정 권한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하지만 논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권력을 동원해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문제다. 만약 역사교과서에 문제가 있다면 엄격한 학문적 기준에 따라 검토하고 수정하면 될 일이다. 그동안 학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사편찬위원회가 집필기준의 작성을 맡아온 까닭이다. 결국 이번 역사교과서 문제는 학계와 국사편찬위원회가 그동안 맡아온 역할을 권력의 힘으로 부정한 것과 다름없는 사태다.

집필자들의 자율성을 확대하기 위해 검정 기준을 축소하는 ‘대강화(大綱化)’의 원칙에 따랐다는 해명도 한심하다. 어째서 대강화의 원칙이 단 한번의 제대로 된 논의도 없이 유독 근현대사 부분에만 적용이 됐는지, 그리고 어째서 북한 관련 서술이 추가되면서 전체 분량은 오히려 늘어나게 됐는지 명확히 알 수가 없다.

역사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과 엄격한 학문적 기준에 따라 서술돼야만 한다. 이념이나 이익에 흔들리지 않아야하며 무엇보다 외부의 부당한 압력에 의해 내용이 바뀐다면 올바른 역사 서술이라고 할 수 없다.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정확한 역사적 자료에 근거해 역사적 개념을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이는 학계가 공동 성명서를 통해 “사료적 근거도 없고, 학문적 성과도 없는 상태에서 교육과정에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교과부와 역추위를 비판했던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념과 정치를 떠나 학문적 하자에 대한 우려를 표하고 있는 것이다.

권력과 이념의 잣대에 따라 뜯어고쳐진 역사교과서가 학문적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혹자는 다음 정권에서 다시 수정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설사 현재와 다른 성격의 정권이 집권한다고 해도 권력이 역사교과서를 제멋대로 수정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결론적으로 권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학계의 자율적인 연구와 논의를 통해 역사교과서를 집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단순한 비판에서 더 나아가 앞으로의 객관성과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관련 법의 개정까지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역사는 언제나 권력 위에 서 있다. 권력을 동원해 역사를 수정하려는 시도는 결국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 우리는 너무도 당연한 이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양기원
서양사학과·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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