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뮤지컬 배우 겸 인디레이블 ‘해적’ 대표 송용진씨

“자네는 밥을 3주 만에 먹나?” 뮤지컬 「셜록 홈즈」의 주인공 홈즈는 사건을 밥에 비유하며 사건 없는 무료한 삶을 괴로워한다. 그러다 사건이 터지면 그는 사건 수색에만 몰두하며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보낸다. 지난 석 달간 이러한 홈즈를 열연한 송용진씨 역시 홈즈를 닮은, 아니 그를 능가하는 구석이 있다. 좋아하는 일들에 폭 파묻혀 밥조차도 제쳐놓고 내달리는 열정으로 가득한 그를 서대문구에 위치한 음악창작단 해적 스튜디오에서 만나 봤다.

사진: 하태승 기자 gkxotmd@snu.kr

바다는 넓고 갈 곳도 많다

스튜디오에 들어서자 그는 “영화 리딩이 갑작스레 잡혀 인터뷰 시간을 늦춰 미안하다”고 말문을 열며 기자를 맞이했다. 그날만해도 그는 오전에 축구를 하고 대본 리딩에 참석했다가, 스튜디오에 들러 인터뷰를 하고 레이블 업무를 본 뒤 새벽에는 뮤지컬 갈라 콘서트 연습에 돌입하는 빠듯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어제도 세 시간 반 정도밖에 자지 못했다”는 그는 뮤지컬 배우·연출가부터 인디레이블 음악창작단 ‘해적’ 대표, 록밴드 ‘쿠바’ 보컬, 영화 배우, 조기축구회 ‘라온 축구단’ 선수, 아마추어 킥 복싱 선수까지 겸하고 있다. 원래 꿈도 많고 욕심도 많기에 여러 꿈을 동시에 이뤄가게 됐다는 그는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만약 누군가가 ‘돈을 줄 테니 이렇게 살아보라’고 하면 절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며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육체적인 피로를 감수하면서도 그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는 이유는 역시나 간단하다. “제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일들이니까요.”

“항상 10년, 20년 후의 내 모습을 상상해보며 살아간다”는 그는 미래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고 곧 바로 행동에 옮겨 그 꿈을 이루는 사람이다. 좋아하는 일들을 만끽하고 있는 현재 모습 역시 그가 오래 전부터 상상해왔던 삶의 궤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10대 시절에는 짐 모리슨을 비롯한 여러 로커의 음악을 들으며 록 뮤지션을 꿈꿨고 대학 졸업 후 홍대 클럽에 입성하며 이를 실현했다. 닳도록 듣던 카세트테이프 뒷면에 박힌 ‘프로듀서’ 네 글자에 설레다 전문적으로 음향을 공부해야겠다 다짐하고 음반 제작자로서의 기틀을 다졌다. 30대에 이른 지금 그는 배우로서 김조광수 감독과 함께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에서 호흡을 맞추며 영화계 일을 하나씩 배워가고 있다. “평소 영화를 굉장히 좋아해요. 30대의 문턱에 이르러 10년 뒤 모습을 상상해봤더니 영화 감독이라는 큰 그림이 그려지더군요.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한 첫 단추로 연기를 택했습니다. 일단은 배우로서 영화계를 차츰 알아가며 40대에는 감독으로 거듭나고 싶어요.”

내 나침반은 도전을 가리킨다

그가 10년 단위로 짜놓는 굵직한 인생 계획을 촘촘히 채워주는 세부 활동 중 하나는 바로 뮤지컬이다. 그는 일 년 내내 쉴 틈도 없이 새로운 작품으로 무대에 분주히 오른다. 올해만 해도 「셜록 홈즈」가 끝나자마자 20대 음악밴드 멤버들의 이야기를 그린 뮤지컬 「오디션」에 합류했다. 13년 전 홍대에서 록 뮤지션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우연히 오디션 제의를 받으며 뮤지컬과 인연을 맺은 그는 록 뮤지션의 특색을 십분 살린 거친 음색으로 관객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가며 큰 사랑을 받았다. 이후 그는 「헤드윅」, 「록키 호러쇼」등의 굵직한 록 뮤지컬에 꾸준히 도전하며 다작 뮤지컬 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하지만 그는 ‘대표적인 록 뮤지컬 배우=송용진’이라고 대중이 만든 단순한 등식에 만족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중에도 그는 뮤지컬 판을 뒤흔들만한 새로운 도전을 예고했다. “내가 10년이 넘게 지켜 본 우리나라 창작 뮤지컬 판에는 비슷비슷한 로맨틱코미디물뿐이었다”고 창작 뮤지컬 장르의 좁은 폭을 실감한 그는 왜 록 뮤지컬을 만들지 않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는 지난해 록 뮤지컬 「치어걸을 찾아서」를 내놓았다. 그의 첫 연출작인 이 작품은 록 음악과 시원스레 터지는 웃음을 관객에게 선사하며 ‘제대로 노는’ 작품으로서 뮤지컬계에 새로운 판도를 보여줬다. 해골 드레스 코드를 맞추지 않으면 공연장에 관객을 들여보내지 않는 건방짐과 공연 내내 육두문자를 걸쭉하게 내뱉는 발칙함으로 똘똘 뭉친 이 작품에 대해 그는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B급 컬트 뮤지컬’임을 당당히 밝힌다. 이는 “천성적으로 판에 박힌 틀을 부수고 남들이 하지 않는 것에 끌리는 편”이라며 새로운 판을 찾아 나서는 그의 모험심이 드러난 사례다.

뮤지컬이라는 판에서 거둔 성과를 바탕으로 그는 자신의 요람인 록 음악에서 더욱 과감한 도전을 펼치기도 했다. 그동안 뮤지컬에서 번 돈을 ‘몽땅’ 쏟아 부어 인디레이블 음악창작단 해적을 꾸린 것. 인디 록 음악이 돈을 벌기 쉬운 분야가 아님을 잘 알지만 이에 대한 애정과 꿈이 큰 만큼 그는 흔쾌히 1억 원에 달하는 거금을 스튜디오 및 장비 마련에 들였다. “언제 무엇을 하고 있든지 내가 죽을 때까지 계속 할 것은 바로 록 음악”이라는 결연한 말에선 그의 ‘올인’이 쉽게 멈추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난파가 두려워 출항을 못하랴

이렇듯 상상 이상의 도전을 계속해가는 그지만 실패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진 않을까. 그는 “실패 자체가 두렵지는 않다”며 “사실 실패와 성공의 기준은 주관적”이라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상업적 흥행 여부를 잣대로 다른 사람들이 ‘실패’라 부를지라도 내가 만족했다면 이는 확실한 ‘성공’인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예술인으로서 어떤 장르든 최선을 다해 노력한 결과가 세상에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성공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타인의 평가가 어떠하든지 스스로가 실망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충고한다. “제작자로서 경제적 성과를 거두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남들이 하는 방식을 그대로 좇아 성공을 꾀하기보다는 나만의 특성을 최대한으로 살리겠다”는 다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오늘도 기존 문화계를 뒤엎을 ‘이상한’, 순화시켜 말하면 ‘독창적인’ 작품 구상으로 골몰하는 그가 되묻는다. “비상업적 요소일지라도 색다른 에너지로 많은 이들의 시선을 끌 수만 있다면 언젠가 상업적인 것이 되지 않을까요?”

그의 거침없는 발걸음은 앞으로도 이어질 예정이다. 그는 장르는 물론이고 국경까지도 뛰어넘는 계획을 조목조목 펼쳐 놓는다. 영화 촬영, 새로운 모놀로그 뮤지컬 연출 계획, 브로드웨이 공연 스텝과 합심해 꾸리는 국제 교류 작품 준비, 쿠바의 새로운 앨범 완성, 새로운 인디 밴드 조직, 그리고 약간의 여유만 허락한다면 아마추어 킥 복싱 시합까지도 참가하고 싶단다. 욕심이 닿는 대로 스스로에게 새로운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는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꿈을 향해 숨 가쁘게 발길을 옮기고 있는 중이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