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과
‘법인화’라는 화두로 대학사회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고도의 전문지식을 갖춘 최대의 집단인 국립대학교수들의 신분변동에 대해서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한데 국회의 졸속논의가 힘을 발휘한 밀어붙이기식 법인화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예상되는 단점을 보완하려는 노력도 미비한 채 입법 후의 기계적 절차에 따라 법인화가 진행되면 법인화의 장단점에 대한 명확한 그림이 불분명한 지금, 예측 가능한 결과는 낭패의 구도뿐이다. 미래 한국 사회의 동량으로 자리 잡을 대학의 역할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축복 속에 진행되는 법인화라면 얼마나 좋으랴.

국립대학이 ‘국립’이라는 탈을 벗고 쓰는 문제는 법적논의를 넘어서 보다 더 근원적인 원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연금 행방과 정년 보장 차원의 기능적 문제도 아니고 일본식 말장난 수준의 ‘국립대학법인’ 차원은 더더욱 아니다. 이땅에 최초의 국립대학으로 설립된 ‘국립서울대학교’는 우여곡절 끝에 미군정이 만들었음을 상기하고 싶다. 국가 없는 명칭상의 ‘국립’이었다. 미군정이 만들었으니 ‘군립’ 정도로 표현하는 것이 솔직했다. 제국일본이 식민지에 설립했던 ‘경성제국대학’에서부터 군정 설립까지의 변신과정 속에서 이 땅의 최초 국립대학은 자율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맹점을 안고 있었다. 지금 ‘법인화’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자율성이라는 점을 자각하지 않으면 법인화의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다. 정관이다, 규정이다, 학칙이다 하는 것들이 모두 자율이라는 기반 위에서 진행돼야함에도 불구하고 자율이란 커다란 이념은 허황된 공염불로 증발하고 있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장면이다. 자율로 다져진 법인화라면 어느 누구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자율과 관련된 한 가지 예를 든다면, ‘학생’이란 용어의 문제다. 이 단어는 제국일본의 침략전쟁 동안 젊은이들을 전쟁동원하기 위해 만든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역사적 성찰 없이 그대로 사용해왔다. 당시 제국대학은 대학의 젊은이들을 ‘학도’라 했고, 대학 미만의 제반 학교에 적을 둔 경우에는 ‘생도’라는 단어를 적용했다. 학도보다는 그 수가 훨씬 많았던 생도들의 사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제국정부는 물타기의 하향평준화를 시도해 양자를 통합한 ‘학생’이라는 용어를 제작하였다. 더불어서 대학의 ‘학생과’는 구성원의 사상조사를 위한 조직으로 탄생됐고 그 조직은 군사독재시대를 경유해 비대해진 상태로 존속 중이다. 자율이라는 문제는 털끝만큼도 고려하지 않는 상황이다. 따라서 ‘학생’이란 개념은 자율의 주체가 아님이 분명하다. 그 용어도 일찍이 폐기됐어야 했다. 모든 구성원의 자율성을 기반으로 교원과 직원에 대한 ‘학원(學員)’이라는 조어의 시도가 가능할지 모르겠다.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사람과 대학에서 배우는 사람은 입장이 크게 다른데 성인과 소년이 동일한 항목의 대상으로 다뤄지는 것도 참으로 이상하다. 초등학교에서도 대학에서도 모두 ‘학생’이니 초등학교에서 나타나는 모습이 대학에서도 연장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법인화’라는 틀에 법적인 차원을 넘어선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이 땅에서 우리 손으로 대학이란 것의 기본적인 구도를 조정하고 만져보는 최초의 작업이기 때문에 그 역사성의 필연성이 얼마나 커다란 문제인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율이 법인화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비전’일 수 있다. 이념이나 사상과 관련된 큰 그림으로서의 비전이란 규정 따위로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이야말로 규정이나 정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토론의 장이 필요하다. 대학 지도부의 리더십은 ‘재창학(再創學)’이라는 희망을 겨냥해야 한다. 외부의 눈치와 속 좁은 꼼수 차원에서 왈가왈부하지 않음으로써 지혜로운 토론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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