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과 같은 그녀

여신과 같은 그녀
최유정


아 엠 소 스윗 걸, 컴온 컴온......신림역으로 열차가 곧 들어옵니다......

지하철 안내양의 희미한 목소리가 신나는 노랫말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열차가 아침 7시 56분에 정확히 신림역에 도착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안내 방송 따위는 대충 흘려버린다. 나는 핸드폰으로 분 단위까지 정확한 시각을 예측해서 행동한다. 길바닥 위에서 쓸데없이 시간을 버리는 일은 하지 않는다.

아침 기상부터 오늘의 날씨, 대중교통, 음악, 최신 뉴스까지 모든 것은 다 한 달 전에 구매한 나의 “똑순이”의 몫이다. 혼자 사는 노총각을 걱정해주고 챙겨주는 것은 여자 친구가 아니라 바로 우리 똑순이다. 몇 달 전 선 자리에서 만난 여자 친구는 너무 바빠서 얼굴 보기가 힘들지만 똑순이는 항상 내 손 안에 있다. 지금도 그녀는 내 오른손 위에 도도하게 앉아서 슬림한 바디 라인을 뽐내며 자체 발광을 한다. 그녀는 외모도 출중하지만 머리도 끝내주게 똑똑하다. 나는 스마트하지 않을지라도 그녀는 스마트한 태생을 타고났다. 그녀와 함께라면 시대를 앞서나가는 트렌디한 도시 남자가 된 기분이다. 귓가에 울리는 캔디걸의 노래를 패러디해본다. 똑순이, 유 알 소 스윗 걸. 소 스마트 걸.

이런 달콤함도 잠시뿐, 악명 높은 2호선 지하철의 문이 열리는 순간, 팽팽하던 물 주머니에 작은 구멍이 뚫린 듯 엄청난 인파가 흘러넘친다. 그리고 딱 그 정도의 사람들이 다시 물주머니를 팽팽하게 메운다. 거스를 수 없는 파도에 휩쓸린 나는 위험천만한 깊은 바닷속으로 이끌려 간다. 내가 내 몸을 제어할 수가 없다. 해상 경비대라도 불러야 할 것 같다. 헬프 미! 헬프 미!

엄청난 사람들 속에서도 앉을 만한 자리가 없는지를 살핀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30-40분 동안 일어서 있는 일은 정말 서럽다. 이 나이 먹도록 자가용 한 대 없다는 현실이 구슬픈 게 아니라 내 몸이 불편하고 힘든 상태에 있다는 것이 짜증이 난다. 다들 파도에 휩쓸려서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 물론, 나만 빼고. 왠지 몇 정거장 뒤인 구로 디지털 단지 역에서 내릴 것처럼 보이는 아저씨들 앞쪽으로 다가간다. 두 아저씨는 허름한 티셔츠 차림이고 주름진 얼굴은 까맣게 탔다. 인생이 고되어 보이는 노동자 아저씨들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나는 똑순이가 들려주는 노래를 반복해서 듣는다. 중독성 있는 훅이 계속 반복되어 머리에 맴돈다. 역시, 우리 캔디걸밖에 없어!!! 나는 똑순이의 액정 화면을 터치하느라 손을 떼지 못한다. 오늘의 뉴스가 궁금해져서 뉴스 앱을 클릭해 보니, 요즘 대통령 선거철이라 그런지 유난히 정치 관련 기사가 많다. <여성이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망한다>라는 자극적인 기사 제목을 클릭해 본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여성 대통령 후보에 대한 긴 기사다. 검지로 스크롤을 빠르게 내리며 내용을 훑어보다가 창을 끈다. 정치면이나 경제면은 아무리 참고 읽으려 해봐도 두 문단을 넘기지 못한다. 머리가 지끈 아파지거나 안구가 흐릿해지는 등 내 몸에서 자동으로 적색 신호를 켠다. 어차피 내용을 다 읽는다 해도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자기 잘났다고 싸우는 내용일 것이다.

인기 기사 1위인 <캔디걸의 미모, 미국에도 역시 먹어주네>라는 제목 위로 손이 자동으로 움직인다. 아끼는 아이돌 그룹인 캔디걸이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콘서트를 마쳤다는 내용이다. 우리 귀요미 아가들 역시 장하다, 장해. 이 오빠가 항상 응원하고 있단다. 지하철 안에서 쌓였던 피로감이 싹 가시고 얼굴에는 금세 미소가 흐른다. 이어서 검지 는 자연스럽게 <원조 베이글 미미, 트위터에 미국서 찍은 사진 올려>라는 기사를 클릭한다. 5인조 걸그룹 캔디걸에서도 가장 빼어난 미모를 소유한 멤버 미미가 트위터에 사진을 올렸다는 내용이다.

내가 어젯밤에 트위터 확인을 못 한 사이에 미미가 사진을 올렸단 말이야? 이걸 벌써 다른 신문사에서 기사로 썼단 말이지? 나는 마음이 급해져서 얼른 트위터 앱을 찾는다. 파란색 새 모양의 아이콘을 클릭하여, 미미의 트위터에 접속한다. “저희는 미국에서 콘서트 무사히 마치고 내일모레면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현지 반응이 정말 뜨겁네요. 이제 세계는 우리의 것?!”이라는 짧은 글을 남겼다. 유독 눈길이 가는 것은 글과 함께 올린 사진인데, 씨스루 룩을 입어서 섹시함을 한껏 강조한 사진이었다. 유 알 소 스윗 걸, 컴온 컴온. 미미의 보일 듯 말 듯한 가슴라인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카카오톡에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한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 아저씨가 “오늘 도착하자마자 회의실로 오세요. 아이템 회의 있는 걸 잊진 않았겠죠?”라는 말풍선을 늘어놓는다.

아! 아이템이라니! 아직 생각해 놓은 게 없는데 어쩌지? 게다가 내가 여자 아이돌 트위터 담당인데 이번 것도 다른 신문한테 물먹었으니 혼날 게 뻔한 일이다. 어떤 아이템을 짜낼까 고민하다가 캔디걸이 내일 한국에 입국한다고 써놓은 트위터가 떠오른다. 공항에 가면 캔디걸을 직접 볼 수 있기 때문에 사심 가득한 아이템이긴 하지만 캔디걸의 입국은 그야말로 모든 남성의 관심사가 아니겠는가? 언론인의 사명감으로 꼭 취재해야 할 의무가 있는 기삿거리다. 대통령 선거 따위와는 비교될 리가 없다.

“구로 디지털 단지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 왼쪽입니다.”

드디어 내가 앉을 차례가 되겠구나 하며 앞에 앉아 있는 노동자 아저씨들을 바라본다. 조금 엉덩이를 들썩들썩하시면서 내릴 준비를 하고 계신다. 조급하고 초조해진다. 하지만 지하철의 문이 열리고 다시 닫혀도 아저씨들은 꿈쩍도 하지 않으신다. 내린 사람은 오히려 아저씨들 옆에 있던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가 떠난 자리는 나보다 늦게 지하철에 탔던 한 남학생의 차지가 된다. 아뿔싸! 나는 세상에서 가장 억울하고 불행한 사람이 된 기분으로 남학생을 노려본다. 남학생이나 노동자 아저씨들뿐만 아니라 앉아 있는 모든 사람을 총으로 쏘고 싶은 충동을 순간적으로 느낀다. 진짜 그러겠다는 게 아니라 그런 느낌이었다는 소리다. 주변에 또 빈자리가 없나 하고 사방을 둘러보는데 앉은 사람보다 나처럼 서 있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그 사실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

신기한 것은 앉아 있든 서 있든 상관없이 많은 사람이 자기 손바닥 위의 작은 세계에 몰입해 있다는 것이다. 책과 종이 신문을 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모두들 MP3, PMP, 핸드폰, 아이패드, 갤럭시탭 등의 기계를 손 위에 올려놓고 있다. PC방의 축소판이다. 이어폰은 사람들의 귓구멍 단자와 기계 단자를 연결한다. 물론, 사람들의 두뇌보다 스마트폰이 훨씬 스마트하지만 말이다. 사람들의 눈동자는 현란한 화면이 반사되어 이 색 저 색으로 번뜩인다. 조그만 기계는 사람들의 청각, 시각, 그들의 뇌를 모두 점령하고 있다. 다들 나처럼 미미의 트위터 사진을 보고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나와는 다르게 정치와 경제 기사를 보고 있는 것일까? 순간 나는 이 상황이 신비롭게 느껴진다. 이 좁고 꽉 막힌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각자 다른,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해 있다는 것이 말이다. 내가 진짜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은 이 많고 많은 사람들일까? 아니면 미미일까? 아무래도 미미인 것 같다.

내가 잠깐 핸드폰에서 눈을 떼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어서일까? 옆에 있던 창백하고 삐쩍 마른 중년 여성분이 다정하게 말을 걸어온다. 입가에 웃음을 가득 짓고 있지만 눈빛은 현실 세계를 초월한 듯 멍하다. 그녀가 뭔가 말하는 듯한 입 모양을 짓자 나는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 한쪽을 뺀다. 뭐라고 하셨어요?/ 저기, 혹시 교회 다니세요?/ 어렸을 적엔 다녔는데 지금은 안 다녀요./ 그래도 예수님은 계속 믿으시는 거죠?/ 아니요, 혐오해요./ 혐오하신다구요? 어떻게 그런 끔찍한 말을 막 하시죠?/ 난 그쪽의 말이 더 끔찍한데/ 오, 진짜 끔찍하도다. 부디 축복이 있으시기를. 독실한 기독교 신자는 내 말에 경악했는지 더는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감히 나에게 말을 걸다니 내가 할 일 없는 한량으로 보였나? 난 바쁜 사람이라고. 요새 유독 예수님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 다가오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 초등학생 때 독실한 어머니를 따라서 억지로 교회에 예배드리러 간 경험이 있지만, 그것 때문에 오히려 종교 자체에 대한 반발심만 커졌다. 기도나 예수라는 단어만 들으면 마치 학교나 공부라는 단어를 들은 것처럼 속이 뒤틀린다. 빼놓았던 이어폰 한쪽을 다시 귓구멍 속에 꽉 끼우고, 음악의 볼륨을 한층 더 높인다. 옆에 서 있는 예수쟁이 여자와 아무 말도 없이 서 있기가 불편한 것도 잠시, 지하철은 드디어 시청역에 도착한다. 시간은 8시 25분. 똑순이가 알려준 예상시간보다 2분 더 늦게 도착한 것이지만 그 정도야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5분만에 지하철 역사를 나가 길을 건너서 회사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거다.

지하철역 밖으로 나가자 또 엄청난 무리의 인간 파도가 형성되어 있다. 사람들 때문에 앞으로 쭉쭉 나가기도 힘든 판에, 주변에선 내 팔을 붙잡고선 무슨 종이 같은 것을 들이민다. 파란색, 노란색, 초록색 등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두 띠를 어깨에 두르고선 찌라시를 나누어 준다. 이어폰을 꽂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뭐라고 지져대든지 상관없다는 태도로 그들의 손길을 무시해버린다. 그들의 입 모양은 “꼭 좀 읽어봐 주세요.”이지만 표정은 “읽든 안 읽든 일단 받아가. 그래야 나도 먹고살거든?”이다. 뒤편에 있는 트럭에서는 쭉쭉빵빵한 누나들이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추고 있다. “아 엠 소 스윗 걸, 컴온 컴온” 나는 누나들의 현란한 춤사위에 이끌려서 스테이지 쪽을 지나쳐간다. 누나들, 아침부터 이게 어쩐 일이에요? 시청역 앞 광장에서 세개의 술집이 동시에 개업 행사를 하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다. 시계를 보니 벌써 8시 30분. 벌써 회의가 시작했을 텐데! 원색 티셔츠를 입은 알바들과 시끄러운 음악, 그리고 많은 인파 때문에 정신이 사나워진 채 이리저리 헤매며 길을 걸어간다. 회사 건물 안 엘리베이터에서 6층을 누른 후 점퍼의 주머니를 보니 찌라시 몇 장이 꽂혀 있다. 정말 끈질긴 녀석들이야. 찌라시를 보고서야 나는 그들이 술집 홍보가 아니라 대통령 후보 홍보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쩐지 나레이터 누나들 외모 퀄리티가 좀 떨어진다 싶었어......

“진규군, 4분 늦었네, 어떻게 된 거야?”
“죄송합니다, 부장님. 밖에 홍보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요.”
“춤추는 언니들과 같이 놀고라도 온 거야? 이리 앉아. 지금 박 기자가 아이템 얘기하는 중이야. 계속하게.”

“네, 아까 말했듯이 배우 지브라(Zebra)가 섹시한 글래머 배우로 최근에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잖아요? 지브라의 의미가 ‘브라가 Z컵’이라는 소문이 있던데요. 하하. 그래서 지브라의 코디를 섭외해서 실제 가슴 사이즈를 알아내는 기사를 쓰려고 해요.” 여배우 담당인 박 기자가 밋밋한 자기 가슴 앞에 두 손을 봉긋이 세우면서 말한다.

“Z컵이 진짜 존재한단 말야? ABCDEFGHI…H까지가 내 한계인데. Z면 지구 한 바퀴를 돌 수도 있겠군. 재미있는 기사가 되겠어?” 홍 부장의 두 눈이 초롱초롱 반짝인다.

“이거, 박 기자의 질투성 기사가 아닌가 몰라요. 박성희씨는 음…. 트리플 A인 것 같은데?” 스캔들 전문인 김 기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박 기자의 몸을 투시하듯 바라본다.

“뭐요? 그런 게 어디에 있어요?”

“신용 평가 등급으로는 최상이라는 얘긴데, 다른 의미로는 정반대가 될 수도 있고.” 김 기자가 슬쩍 다른 곳을 쳐다보면서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다.

“아무튼 박 기자는 제목을 뭐로 뽑을 건가?”
“몇 가지를 생각해봤는데, <지브라의 z는 z컵의 z?>로 생각해봤어요.”
“음…. 딱 봤을 때 제목에서 섹시한 느낌이 안 오잖아. 알파벳도 많아서 눈에 안 띄잖아. 차라리 <지브라 스스로 자신이 z컵이라고 공인…> 이런 식으로 말하면 한국 남자들은 다 클릭해본다고. 전 국민 수가 5천만이니까, 절반인 2,500만 명만 클릭해도 대박이지. 진규씨 같으면 클릭해보겠나? 그냥 지나치겠나?”
“몇번이고 클릭해보고 추천까지 누르겠죠.”
“그래, 진정한 남자군. 진규씨, 내가 기사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했지?”
“정확성이 아닐까요?”
“허허. 지금 농담하는 건가? 아직 이 중요한 원칙을 모른단 말야? 정확성, 객관성 같은 건 다른 언론사한텐 통할지도 몰라. 우리 같은 연예 전문 언론사는 다른 룰을 적용해야지.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선정성이야. 무엇이 선정적이어야 하느냐? 바로 제목이 그래. 제목이 섹시하면 곧 뭐를 부른다? 박 기자?”
“클릭 수죠. 클릭 수는 곧 돈줄이고.”
“빙고. 네티즌들이 우리 기사 클릭을 많이 할수록 광고는 늘어나고 우리가 버는 돈도 늘어나는 거지. 그러니까 진규씨가 돈을 많이 벌고 싶으면 무조건 선정적으로 써. 제목이 꼭 기사 내용을 정확하게 짚어낼 필요도 없어. 기사 내용도 정확할 필요가 없지만.”
“부장님, 그런데요. 기사가 정확하지 않아서 연예인 쪽에서 고소하면 어쩌죠?”

“꼭 들어온 지 한 달밖에 안 된 티를 내는군. 요즘은 노이즈 마케팅 시대야. 도박이나 마약 정도로 연예인 생활을 망하게 하는 게 아니면 어떤 기사라도 다 좋아. 오히려 그쪽에서 반긴다고. 중요한 건 정확성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줘서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하는가지.” 홍 부장은 자신의 현실적인 철학을 달변으로 말한 것이 뿌듯하게 느껴진 나머지 함박 미소를 짓는다.

“그렇군요.”

“정진규씨도 최근에 여배우 지브라가 2년 전에 찍었다는 스캔들 비디오 봤죠? 그것 때문에 지브라가 망했나요? 아시다시피 오히려 비디오 덕분에 무명에서 스타로 한번에 껑충 뛰어올랐죠. 그게 누구 덕분이겠어요? 다 스캔들 전문 기자인 저 같은 사람 덕이지.” 김 기자가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씨익 웃는다.

“맞아. 지브라는 우리 덕분에 스타가 된 거야. 그럼, 신참인 진규씨는 이번에 어떤 핫 아이템을 가지고 왔나?” 홍 부장의 말투는 어린아이에게 말을 거는 것 같은 태도다.

“아, 저는 내일 캔디걸이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공항에 나가볼까 합니다. 국내 최고의 걸그룹답게 엄청난 공항 패션을 선보일 것으로 예상합니다.”
“오, 그럼 나를 위해서 좋은 사진도 많이 찍어오도록 해. 내일 공항이 취재진과 팬들로 아주 북적댈 거야. 오늘밤부터 가서 서 있어.”
“밤부터요?”
“그 정도는 해야지. 다른 그룹도 아니고 캔디걸이면 각종 방송사와 신문사, 완전 듣보잡인 인터넷 뉴스들도 다 온다고. 게다가 팬클럽은 아마 지금부터 가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네, 알겠습니다.”

“진규씨, 아까 트위터 보니깐 캔디걸 팬클럽 천명 정도가 내일 공항에 갈 예정이라던데요?” 박 기자는 염려하면서도 재밌을 것 같다는 애매한 표정을 짓는다.

“괜찮겠죠. 이래 봬도 제가 특전사 출신이라서.”
“아 네. 건승하세요.”

대답은 씩씩하게 하지만 내 속은 썩어가고 있다. 공항으로 취재 가는 것을 지나치게 쉽게 여겼다는 것을 깨닫는다. 등도 땅바닥에 누이지 못한 채 밤을 꼴딱 새워서 고개를 들고 있어야 하다니. 30대 중반이나 되어서 내 나이 절반쯤 되는 어린 애들을 보려고 고생하는 내 처지가 불쌍해지긴 하지만, 그래도 무려 캔디걸이 아닌가! 이 아이들이 나의 돈줄이며 유일한 희망인데. 이 5명의 어린 소녀들이 내게는 종교나 다름이 없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가서 성탄절 전야 예배를 드린 적이 있다.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예수님을 위해서도 잠을 참으면서 억지로 밤을 새웠는데, 그에 비하면 캔디걸은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만으로도 축복받은 것이 아닐까? 미미의 귀엽고 예쁜 얼굴과 글래머러스한 몸매는 그야말로 여신 강림이다. 어디서 성령 강림 따위와 비교를 하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회사 일이 끝난 후 경건한 마음으로 인천공항에 가는 버스를 탄다. 푹신한 좌석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데 똑순이가 내 허벅지 살에 미세한 진동을 일으킨다. 여자 친구가 영상 통화를 걸어온 것이다. 어쩐 일이지? 얼굴을 직접 본 지가 한 달이 넘은 탓에 존재감마저 희미해진 여자 친구다. 여보세요./진규씨, 잘 지내?/응, 그냥 그럭저럭. 출장 때문에 많이 바쁘냐?/뭐 항상 바쁘지. 진규씨는 새로 옮긴 직장 어때?/나야말로 잘 지내고 있지./그렇구나. 혹시 내일 시간 있어? 오랜만에 얼굴 좀 보자./내일? 나 캔디걸 취재하러 가는데? 근데 너 안 보는 사이에 얼굴에 살이 좀 오른 것 같다?/요즘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많이 먹었더니 그런가봐./ 많이 먹었나보다. 관리 좀 해라. 브이라인이 대세인 거 모르냐?/진규씨가 맨날 예쁜 연예인만 보니까 기준이 높아서 그래. 걔네 다 성형이잖아 어차피./성형해서 예쁘면 하는 게 더 나은 것 같더라./그건 무슨 소리야? 갑자기 오랜만에 전화하는데 왜 이렇게 까칠해?/ 미안해. 밤을 새야 해서 좀 예민해 졌나 봐. 근데 아무튼 앞으로는 영상 없이 그냥 통화하자./왜? 내 얼굴이 마음에 안 들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됐어. 끊어. 나 회의 들어가야 해./ 아니, 그게 아니고, 세은아./ 나쁜 새끼./ 뚜. 뚜. 뚜. 뚜. 뚜. 야 왜 끊어? 뭐 나쁜 새끼? 항상 이런 식이지, 내가 뭐. 그런데 강세은. 너도 인간적으로 그런 얼굴을 나한테 들이밀면 안 되는 거지.

세은이의 기분을 상하게 한 채로 전화를 끊으니 기분이 찝찝하다. 하지만 화장을 지웠다거나 추리닝 차림이라거나 돋보기안경을 썼다거나 못생겨 보일 때는 이상하게 사랑하는 마음이 반감된다. 그러지 않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보아도 이성을 발휘해서 그녀의 착한 마음씨와 장점만을 생각해보려고 해보아도 잘되지 않는다. 미안하지만 내 감정 상태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을 어찌하랴. 여자에 대한 미적 기준은 나침반의 N극과도 같아서 나의 마음은 외부의 압력에 조금 흔들리다가도 결국에는 북쪽을 가리킬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자책감을 떨쳐 버리고 기분 전환을 하기 위해서 나는 똑순이를 집어 든다. 이어폰을 두 귀에 꽂고 빠른 손놀림으로 화면을 터치하여 음악을 재생시킨다. “아 엠 소 스윗 걸, 컴온 컴온” 단지 음악만 틀었을 뿐인데, 버스 통로에는 5명의 요정들이 출렁출렁 몸을 요염하게 흔들어댄다. 그래, 미미는 항상 예쁘고 달콤하지. 이 오빠의 넓은 품에 안겨라, 미미야!

밤새도록 캔디걸은 자신들의 히트곡 “스윗걸”의 멜로디에 맞춰서 미친 듯이 춤을 춰댔다. 춤을 추는 그녀들과 하나가 된 나는 z컵만 한 지구의 둘레를 몇 바퀴고 뛰어다녔다. 남극에 갔다가 다시 북극으로 원점 회귀하는 운동을 몇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이 영원한 원심력 운동을 멈추게 한 것은 내 허벅지를 떨게 하는 똑순이의 진동이다. 여보세요./안녕하세요, 정진규씨 맞으시죠? (아주 오랜만에 들어보는 상냥하고 정감 가는 목소리다)/네, 맞는데요? 누구시죠?/안녕하세요, 오늘 생일이시죠?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네? 오늘이 제 생일이에요?/그렇습니다. 정신이 없으신가 봐요. 오늘은 5월 4일인데요. 생일 맞으시죠?/네, 그렇죠. 벌써 5월이 되었나요?/그렇습니다. 진규씨. 제가 이렇게 생일을 처음 알려 드리게 되어서 기쁘네요. 저는 다름이 아니라 이번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김한국씨를 대신해서 이렇게 전화 드리는 겁니다. 얼마 후 있을 선거 때 꼭 소중한 한 표 행사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한다는 말 꼭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저를 사랑하시나요?/그럼요, 김한국씨는 국민 모두를 사랑하고 계신답니다./김한국씨 말구요. 아가씨 말이에요./네, 그럼요. 좋은 하루 되세요. 그럼 이만./뚜. 뚜. 뚜. 뚜. 뚜.

아침 일찍부터 내 생일을 축하해주는 여자도 있고 난 참 행복한 녀석이야. 세은이는 여자 친구라는 애가 뭐 하고 있는 거야? 아, 어제 싸웠었지. 아, 그래서 나보고 내일 뭐하냐고 물어봤던 건가?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런 얼굴을 핸드폰 화면에 들이대는 건 안구 습격이지! 우리 미미 정도는 되어야지. 눈은 하늘에 박힌 별처럼 빛나고, 얼굴은 도자기같이 하얗고, 코는 볼륨감 있게 솟았고, 가슴은 속까지 알찬 수박처럼 얼마나 실한지, 허리는 잘록하고, 엉덩이는 탱탱하고, 허벅지에는 꿀이 넘쳐흘러 달콤하지. 청순 글래머라든지 베이글이라는 이름이 괜히 나오겠어? 저기 팬클럽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에도 쓰여 있군. <이 시대의 진정한 베이글녀 미미> 진리야, 진리.

어젯밤 도착했을 때 5번 게이트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은 분명 나와 5명의 소녀들뿐이었는데, 지금은 수천명의 인파가 몰려 있다. 캔디걸이 입국하는 시간이 다가오자, 주변에는 엄청난 수의 카메라와 기자들, 팬클럽 단원들이 앞쪽으로 나오려고 발버둥을 친다. 나는 또다시 파도의 물살에 휩쓸려 머나먼 미지의 세계로 휩쓸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의자를 바싹 잡는다. 지하철 2호선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공항에 있는 사람들의 90%는 남성이었기 때문에 앞, 뒤, 좌, 우에서 밀려오는 압력이 더욱 거세게 느껴진다.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팬클럽 사람들은 상상했던 것처럼 어리고 철없는 중, 고등학생들이 아니었다. 그 남자들은 옷만 자유복이었을 따름이지 체격과 태도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군부대다.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고, 중년에 가까운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에 흠칫 놀라면서도 큰 용기를 얻는다.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신문사 기자가 혼잣말하듯이 내게 속삭인다. “평일 오전 10시에 이렇게 많은 남성들이 모이다니, 청년 실업이 심각하긴 한가 봐.” 내가 주위의 수많은 검은 머리들을 보면서 한국인의 머리는 왜 검은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옆에 있던 기자가 소리친다. “캔디걸 납신다!”

캔디걸의 매니저나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출구로 나오자, ‘오오오’, ‘우씨우씨’ 저음의 남성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신음하듯이 터져 나온다. 매니저와 관계자는 모자와 마스크를 쓴 채로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 나는 뒤이어서 등장할 미미의 모습에 잔뜩 긴장하면서 사진기의 앵글을 맞춘다. 어떤 공항 패션을 보여줄 것인가? 큐트? 섹시? 어떤 옷을 입고 나오든 나의 기사 제목과 내용은 이미 정해져 있다. <캔디걸, 역시 공항 패션의 종결자> 내지는 <캔디걸, 공항의 수많은 인파들 홀리는 공항 미모>. 옷의 구체적인 느낌이 어떤지에 따라서 단어의 앞뒤에 수식어만 조금 더 첨가해주면 될 것이다. 캔디걸이 등장할 순간이 다가오자 뒤에서는 체육대회 때 줄다리기를 하는 것과 같은 괴력이 느껴진다. 특히 팬클럽 사람들은 시위를 진압하는 전경처럼 무릎과 어깨로 앞 사람들을 게이트 쪽으로 들이민다. 밤에 한숨도 못 자고 아침도 먹지 못한 상태라 기진맥진한 나는 파도의 물결에 휩쓸려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보디가드들이 지키고 있는 최전방까지 나아가서 게이트 너머로 들어오는 다섯명의 여인들을 본다.

아니, 너희가 캔디걸이냐? 다섯명의 여인들은 일제히 흰 운동화, 검은 긴 바지, 검은 점퍼, 검은 장갑, 얼굴을 다 가릴 정도로 큰 마스크, 검은 왕눈이 선글라스, 검은 캡 모자를 써서 피부의 세포 하나도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이 보인다. 이 정체 모를 여인들은 캔디걸일 리가 없고 백댄서나 개인 코디 정도 될 터이다. 따뜻한 5월 초에 펼쳐지는 흉측한 공항 패션에 나는 절로 혀를 내두른다. 아무리 백댄서라고 해도 기획사에서 이런 옷을 입게 내버려 두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 같다. 맨 앞줄에 있는 나는 이 여자들이 캔디걸이 아닌 것을 알고 있지만 그걸 모르는 뒷사람들은 더 거세게 앞 사람을 밀어 댄다. 나는 뒤에서부터 몰아치는 파도의 거센 위력으로 인해 오뚝이처럼 앞뒤로 갈팡질팡하다가 무게중심을 잃는다. 내 몸은 빨간 경계선을 넘어서서 검은 옷 여자 3의 발 위로 쓰러진다. 검은 옷 여자 3도 중심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는다. 그 충격으로 인해 검은 선글라스는 멀리 날아가 대리석 바닥 위로 떨어진다.

아뿔싸, 선글라스를 벗은 그녀의 똘망똘망한 눈이 매우 낯이 익다. 그녀는 아픔을 참으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서 내 쪽으로 다가온다. 흰 마스크를 벗고선 내 얼굴 가까이에 대고 말한다. 괜찮아요?/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다행이네요./얼굴이 낯이 익는데./흠, 저 못 알아보시겠어요?/혹시./네, 맞아요./생각과 많이 다르네요./그래서 어쩌라구요?

미미는 내 말에 기분이 나빴는지 쌀쌀맞게 나를 쏘아본다. 그리고선 재빨리 마스크로 입을 가리고 선글라스를 낀 후 보디가드의 비호를 받으며 공항 밖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수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파도도 썰물처럼 공항 밖으로 빠져나간다. 나는 갑작스럽게 미미의 얼굴을 본 것에 대한 충격에 휩싸여서 몸이 아픈지도 모른다. 우리 여신 미미도, 내가 컴퓨터에서 보던 미미도, 내가 TV에서 보던 미미도, 핸드폰에서 보던 미미도, 어젯밤 계속 함께 춤을 추던 미미도, 항상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박혀 있는 북극성 같던 미미마저도 모두 화장이었구나. 화장술. 가면술. 복면술. 조명술. 요술. 마술.

“저기요, 아저씨. 술 먹었어요? 왜 여기 계속 누워 있어요?” 건장한 경비원이 내 몸을 격하게 흔든다. “아저씨. 넘어지면서 여기 핸드폰 떨어뜨렸네. 빨리 이거 주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가세요. 캔디걸도 여기 없는데 뭐하는 거에요, 지금? 공공장소에서 이러시면 완전 곤란한 거 알죠?” 그는 내 몸을 일으키면서 핸드폰을 손에 쥐여준다. 핸드폰의 촉감이 예전 같지 않다. 똑순이에게 입혀줬던 투명한 케이스는 산산조각이 났고 액정도 사람들의 발에 밟혀서 매우 더럽다. 나는 비참한 표정으로 경비원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묻는다. “그런데요, 방금 지나간 여자들이 캔디걸 맞아요? 진짜 맞아요?” 경비원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답한다. “미국에서 최근에 신종플루 터진 것도 몰라요? 캔디걸이 바이러스 옮길 수도 있으니까 무장한 거지 뭐.”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런 패션으로 공항에 올 수 있는 거죠?” 이미 경비원은 공항 밖으로 서로 나가려는 무질서한 사람들을 제지하려고 떠나 버렸다.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수십 가지의 고뇌가 적힌 룰렛이 돌아간다. 오늘 기사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공항 패션 종결자>라는 제목까지 벌써 만들어버렸는데. 또 물먹게 생겼네. 홍 부장님 얼굴은 또 어떻게 보나. 어젯밤부터 밤새우면서 고생한 건 또 어떻게 되나. 이런 현실적인 고민도 문제이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캔디걸에 대한 실망감이다. 몇 년 동안 캔디걸에게 바친 충성심은 미미의 민낯으로 인해서 한순간에 무너졌다. 한 10초 동안 대화를 나누면서 바라본 미미의 얼굴은 흡사 요괴와 같았다. 붉은 두드러기인지 여드름인지 모를 것들이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그건 미인 얼굴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사람 얼굴이 아니었어. 그건 뭐 붉은 얼굴 피오나 공주인걸. 지금까지 화장발과 조명발에 속아왔다고 생각하니 정말 분하다. 순간, 미미의 얼굴에 비하면 차라리 여자 친구의 얼굴이 훨씬 낫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불과 12시간 전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서 여자 친구는 착하게도 생일 파티 약속을 잡기 위해서 나에게 전화를 했고 나는 핸드폰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오히려 타박을 줬다. 마치 대역 죄인이 된 듯한 느낌이 들어 그녀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를 해야만 할 것 같다.

핸드폰을 꺼내서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전혀 알 수 없는 클래식 곡이 흐른다. 클래식 곡이 세 번 반복 되도록 응답은 없다. 제발 전화 좀 받아줘. 이 오빠가 다 잘못했다. 후회는 항상 뒤늦은 법. 망연자실해서 손 위에 있는 똑순이를 가만히 바라본다. 사람들에게 짓밟힌 그녀는 열 받은 모양인지 유난히 뜨겁다. 화면도 조금 흐릿한 게 성에가 낀 것 같다. 검지는 자동으로 인터넷 앱을 눌러 보지만 작동하지 않는다. 웹툰 앱도 뉴스 앱도 다 먹통이다. 그뿐만 아니라 핸드폰의 속도도 현저히 느리다. 이게 무슨 일이지? 똑순아, 너마저 날 배신하면 안 돼! 미미도 떠나가고, 세은이도 떠나간 판에!

집에 도착하자마자 컴퓨터를 켠다. 네이버 검색창에 “아이폰 속도 느려짐”이라는 단어를 친다. 지식인에는 역시 나와 같은 질문을 올린 사람들이 있고, 답변도 달려 있다. Q: 아이폰 속도가 너무너무 느려졌어요. 인터넷도 잘 안되네요. 어떻게 고치죠? A: 그럴 경우에는 컴퓨터와 아이폰을 연결하시고, www.viruscure.com/iphone4 에 접속하셔서 프로그램을 아이폰으로 바로 다운받으세요.

나는 바로 사이트에 접속해서 파일을 다운로드받는다. 핸드폰으로 파일을 받는 데만 벌써 30분이 다 되어 간다. 똑순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뜨거워진다. 화면도 더 흐릿해지는 것 같다. 핸드폰도 사람처럼 열도 나고 땀도 나고 그러는구나. 미국에서 갓 날아온 캔디걸이 신종플루 바이러스를 우리 똑순이에게 뿌린 게 분명하다는 터무니없는 추측도 해본다. 다운로드가 완료되었다는 표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핸드폰의 액정에 정전이 온다. 어! 까맣다. 전원을 다시 눌러봐도, 배터리를 갈아 끼어 봐도 똑순이는 여전히 암흑의 상태 속에 있다. 이럴 수가 없어. 어찌 된 거지? 나는 다시 지식인의 답변을 읽어 본다. 아래에 댓글 2개가 달려 있다. 댓글 1: 이 사람 답변 절대 믿지 마세요. 이 글은 바이러스를 퍼트리려는 사람이 쓴 글이니 절대 절대 받지 마세요. 댓글 2: ㅇㅇ, 맞아요. 저 새끼 일부러 엿먹이려고 저러는 거에요. 저도 윗님 답변 아니었으면 병신될 뻔 했음.zzzz

나, 순식간에 병신되었네. 이런. 헐. 바로 아래에 댓글이 있었는데 왜 안 읽었지? 너무 마음이 급한 나머지 바로 밑에 있는 글은 읽을 생각조차 못했었다. 오 마이 갓! 혈압 올라 미쳐 버리겠네. 바보 같은 주인 때문에 바이러스 걸리다니, 어떻게 해? 우리 똑순이 이제 어떻게 해? 똑순이 없으면 내 생활은 완전히 망가져 버리는데! 어떻게 하지? 그래, 아프면 어서 병원에 데려가 줘야지. 나는 똑순이를 데리고 서둘러서 집 근처에 있는 수리점으로 미친 듯이 뛰어간다.

“이거, 완전히 바이러스에 단단히 감염되었네요. 신종 바이러스에요. 아이폰 전용 바이러스인데요?” 똑순이의 몸을 분리하여 이리저리 들여다보던 아저씨가 말한다.

“핸드폰도 바이러스에 걸리나요?”
“인터넷이 되는 이상 어쩔 수 없죠. 컴퓨터와 마찬가지죠.”
“그럼 언제쯤 고칠 수 있나요?”
“사실, 이런 바이러스는 처음 보는 거라서...... 본사로 올려보내서 연구를 좀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아시다시피 요즘 양키 놈들 때문에 신종플루 난리잖아요? 우리가 처음 보는 바이러스니까 고치는 데도 시간이 좀 걸리 듯이, 얘도 똑같죠 뭐.”

“얼마나 걸리는 거에요?” 나는 초조하게 물어본다.

“장담할 수 없습니다. 신종 바이러스라. 알아낼 때까지 걸리겠죠?” 아저씨는 담담한 어투로 대답한다.

“알아낼 때까지라뇨? 그렇게 무책임한 말이 어디에 있어요? 그럼 그동안 사람들이랑 연락은 어떻게 해요?” 나는 얼굴 끝까지 혈압이 오른다.

“그동안 이 핸드폰을 대신 좀 쓰고 계세요. 인터넷은 안 되지만 그래도 전화랑 문자용으로. 고치는 대로 연락드릴게요.” 아저씨는 이젠 구형이 되어버린 묵직한 폴더폰을 내민다. 이거 10년 전에 나온 모델 아냐? 나는 보상비라도 내놓으라고 화를 내려고 하는 찰나에 그가 갑자기 끼어들어 말한다.

“그런데, 얼굴이 너무 빨가신 거 같아요. 아세요? 열이 나는 것처럼 보이는데?”
“열이요? 지금 열이 안 나게 생겼어요? 스마트폰 대신에 이런 똥폰을 줘 놓고선?”

“아주 뜨겁네요. 아이폰에게 감염되신 거 아니에요?” 아저씨는 내 이마 위로 손을 살짝 올려놓는다.

“아니, 이 아저씨가 장난하나 지금.”
“얼굴에 무슨 빨간 두드러기도 나는 것 같고.”
“두드러기요?”
“여드름 같기도 하고.”
“여드름이요?”
“증상이. 아무래도 옮은 거 맞는 것 같은데, 빨리 병원에 가 보시는 게 어떻겠어요?”

나는 수리점 안에 있는 거울을 본다. 얼굴은 열 때문에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정말 문제인 것은 코 주변에 난 서너개의 작은 종기다. 분명히 어젯밤만 해도 이런 게 없었는데? 순간적으로 아까 봤던 미미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래, 며칠 전에 트위터에 올린 미미의 사진에도 종기는 없었는데, 오늘은 있었지. 지금 나한테 난 것과 똑같은 두드러기인지 여드름인지 모를 뭔가가. 아저씨가 준 똥폰을 챙겨서 재빨리 밖으로 나선다. 어디로 가야 하지? 어떤 병원으로 가야 하지? 내과? 이비인후과? 종합병원? 소아과? 동물병원? 어떤 수리점을 가야 하냐고? 이 똥폰은 인터넷도 안 되고 내비게이션도 안 되니 참 답답한 일일세. 손에 쥐고 있던 똥폰을 보며 힘이 스르륵 풀린다.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어디로? 갑자기 핸드폰에서 무미건조한 신호음이 울린다.

“야, 너 지금 장난해? 왜 핸드폰 끄고 있어? 회사 짤리고 싶어?”
“홍 부장님! 죄송합니다. 핸드폰이 신종플루에 걸려서.”
“지금 장난해? 완전 기삿감이네. 니가 걸린 게 아니고 핸드폰이 걸렸다고? 지금 날 놀리는 건가?”
“아뇨, 진짜에요. 홍 부장님. 여기 수리점 와서 물어보세요.”
“야, 새끼야. 신종플루는 니 폰이 아니라 캔디걸이 걸렸어. 걔네 모두 신종플루 확진 판정을 받아서 전국이 난리 법석이야. 그걸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단서가 뭐겠어? 공항에서 찍은 사진 아니겠어? 야, 임마. 너 이제 나랑 그만 보자.”

삐.삐.삐.삐...... 아. 정말 환장하겠네........ 그래도 내 핸드폰이 정말 신종플루에 걸렸다는 걸 보여주면 믿으실 거야. 그건 그렇고, 지금 나도 신종플루에 걸린 것 같으니까 병원에 가는 게 가장 급한 일인데. 어떤 병원으로 가야 하지? 병원은 어디에 있지? 정말 울고 싶다. 길 위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뒤에서 말을 걸어온다.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시간 좀 있으세요?” 삐쩍 마르고 파리한 중년의 여자가 말을 걸어온다. 왠지 낯이 익는 얼굴이다.

“아, 제가 지금 아파서요, 병원에 가려고 해요.” 이 여자는 내가 가야 할 길을 알려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병원에 가세요? 어디가 아프신가 봐요? 오, 열이 많이 나시는군요.” 여자가 파리한 손을 내 이마와 볼 위로 갖다 댄다.

“제가 길을 안내해 드리죠. 가는 길에 함께 대화 좀 나눠요.”

“데리고 가주시는 건가요?” 나는 희망에 부풀어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묻는다.

“그럼요.” 여자는 활짝 웃는 얼굴로 흔쾌히 대답한다.

“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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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예수님을 믿으시나요?”
“예수님이요? 믿죠. 저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시군요. 잘 되었네요.”
“병원에만 잘 데려다 주시면, 제가 나중에 사례도 해 드리고, 교회도 열심히 나갈게요.”
“정말 착하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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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나타나는 병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몸의 병을 고치기 위해선 마음의 병을 고쳐야 하지요.”
“네?”
“마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동안 기도를 드리며 참회해야 합니다. 그동안 죄가 많이 쌓이셨기 때문입니다. 저와 앞으로 계속 기도를 하면서 마음의 병을 깨끗이 씻도록 합시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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