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교육과

훈풍의 계절, 봄이 왔다. 아지랑이 사이로 싱그러운 새순이 싹트고 있다. 캠퍼스는 봄인데 우리들 마음속은 어떤가. 봄바람은 불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법인화와 등록금 문제로 분노해있다. 대기업과 기성 정치권에 화가 나 있다. 왜 그렇게 분노해있는가. 배고파서 그런가. 배아파서 그런가. 그러한 분노는 그칠 줄 모른다. 봄은 왔는데 우리의 마음은 꽁꽁 얼어있다. 

취업난이라는 쓰나미로 힘들어하는 졸업생이여. 합격의 기쁨으로 즐거워했던 신입생 시절을 기억하는가. 살다 보면 사랑했던 절친과 헤어지는 아픔도 있지만 새로 사귄 친구와 여행을 다녀오는 즐거움도 있다. 이렇게 인생의 굴곡이 있음을 우리는 이성을 통해 알고 있다. 보다 나은 이성을 얻기 위해 이곳 서울대에 모인 우리들 아닌가. 기왕에 모인 거, 훈남, 훈녀가 되어보면 어떨까. 훈풍도 불고 있는데. 

요즈음 훈남, 훈녀 하면 먼저 돈이나 외모가 떠오르는 게 현실이다. 연애 상대가 둘 다 갖추고 있다면 손쉽게 뜨거운 사랑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2% 부족하다. 왜일까? 차가운 사랑이란 게 있다. 여러분의 부모님이 젊었을 때의 뜨거운 연애감정은 없지만 정 때문에 산다고 할 때, 바로 그것이 이성으로 하는 차가운 사랑이다. 차가운 사랑 없이 뜨거운 사랑만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분노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뜨거운 사랑만 할 수 없듯이 항상 격앙된 감정으로 분노의 찌꺼기를 발산하면 어떻게 될까. 이성적이지 못한 묻지마 분노는 개인과 사회 모두를 해친다. 물론 젊은이라면 부당한 인권을 보고 분노할 줄도 알아야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국가 의식과 책임감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큰 그림을 그리면서 정당한 분노를 표출할 수 있다.   

물론 훈남, 훈녀의 기준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엄친아, 차도남, 까도녀 등 다양한 별칭이 등장하는 이유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공히 멋이란 게 있다. 멋이란 하루아침에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다면 귀하지 않으리라. 돈이나 외모도 그렇다. 일하지 않고 가꾸지 않으면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점점 사라지고 만다. 어찌 그뿐인가. 도덕과 법은 지키기가 더욱 어렵다. 고소득층은 있는데 진정한 상류사회가 없는 우리 사회를 보면 더 어려운 게 맞긴 맞나보다. 그래서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더욱 고귀하고 아름답다. 멋을 지향하는 훈남, 훈녀라면 귀담아 들어야할 대목이 아닐까.

여러분은 ‘서울대답다’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그말을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대한민국의 이정표가 떠오르는가. 서울대 폐지론이 떠오르는가. 나는 훈남, 훈녀가 훈풍이 불고 있는 관악에 가득 찼으면 좋겠다. 그들은 항상 분노로 가득 차 있거나 결코 낮게 날지 않는다. 훈훈한 마음을 가지고 높이 날면서 한반도 전체와 세계를 보고 수십년 앞을 내다본다. 혹시 추운 겨울 다음에 따뜻한 봄이 오는 이유를 알고 있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미 훈남, 훈녀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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