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이 대중화되기 전인 1990년대 중반, 영화 「비포선라이즈」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열차 안에서 만난 낯선 이와 삶과 예술과 세상에 대해 얘기하며 서로를 알아가는 모습은 비엔나의 아름다운 풍경과 어우러져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일 뿐, 훗날의 배낭여행은 두가지 깨달음을 주었다. 설령 줄리 델피가 앞에 앉는다 한들 그런 미인이 내게 말을 걸 리 없다는 것. 그리고 열차의 가격이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비싸다는 것. 

최근 KTX 일부 구간에 대한 민영화 계획이 들려온다. 정부는 경쟁력 제고, 즉 값싸고 좋은 상품을 제공하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사실 이러한 기간산업에 대한 민영화 시도는 이전 정부에서도 추진된 바 있다. 지난 2002년 공공부문 민영화를 막기 위한 철도·가스·발전 노동자들의 공동파업, 특히 38일간의 투쟁 끝에 384명이 해고됐던 발전 노동자들의 격렬한 반대가 없었다면 지금의 민영화 논쟁은 이미 10년 전에 끝났으리라.

다시 등장한 민영화 논의가 어떤 결론으로 마무리될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 결말이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는 논의 과정을 거쳐야 하고 결정에 대한 평가와 책임이 뒤따라야 함은 분명하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책 결정이 국민의 의사와 분리될 수 없다는 점, 요컨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와야 함을 구태여 논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제 근대 민주주의 국가의 당연한 상식을 수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2012년 3월 15일 0시를 기해 한미FTA가 발효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구성 원리를 만들어내던 입법·행정·사법부를 뛰어넘는 존재가 등장할 때, 그리해 국민이 통제할 수 없는 권력이 작동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선뜻 예측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의 주장처럼, FTA는 전세계 최대의 시장을 열어주고 한국을 글로벌 금융 허브 국가로 성장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껏 실현된 적 없는 소망보다 이미 있던 현실이 되풀이 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몰락한 아일랜드, 극단적 양극화와 농민들의 무장투쟁이 벌어졌던 멕시코, 물 민영화를 되돌리기 위해 6명이 목숨을 잃었던 볼리비아의 사례는 엄연한 지구 한켠의 현실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미 1900년대 초반 의사결정권이 민족공동체에 온전히 주어지지 않았을 때의 비극을, 1990년대 후반 경제적 재화에 대한 결정이 국가 외부의 요구에 의해 제약받았을 때의 어려움을 경험한 바 있지 않은가. 

더 큰 문제는 한번 결정된 것은 되돌릴 수 없다는 비가역성일 것이다. 역전승의 가능성이 사라진 게임. 이대로 2주가 흐른다면, 미래는 고정돼 있지 않다는 명제는 더이상 진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월스트리트의 고층 빌딩을 올려다보면 진리를 되찾기 위한 노력 자체가 무기력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곳의 공원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한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대 마야인들의 달력과는 달리, 2012년 3월 15일에 지구가 멸망하지는 않을테니. 

김경근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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