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총선과 대선의 해다. 국민들은 정치권의 자폐증상을 감지한 듯하고, 정치권도 정치에 대한 세간의 불만이 환멸의 수준에 근접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여·야당을 막론하고 대대적인 인물 교체를 공언하고 있다. 그러나 미흡한 교체의 폭이 ‘민주화의 답보상태’의 주원인일까? 수적으로 근래 정치인들의 교체는 사실 적지 않다. 예컨대 16·17·18대 국회의 초선의원의 비율은 41%에서 63% 사이를 점한다. 소위 ‘구세대’의 책임만도 아닌 듯하다. 정치주도 세대도 젊어져 17대 국회에서는 민주주의의 세례를 받았다고 할 4-50대가 75%를 차지했다. 그럼에도 선거를 앞두고 통합, 당명 개정, 신당 창당 등 익숙한 정치행태들은 재연된다. 사회의 온갖 욕구의 대립과 갈등을 조정, 협상하는 역동적인 장이 정치이기는 하나, 의미심장해 보이기까지 하는 “정치는 생물과 같다”라는 비유로 배제의 욕망과 승리의 의지 외에는 다른 뚜렷한 대의를 찾기 힘든 ‘무원칙의 정치’가 당연시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실 정치에 대한 불만은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이 땅의 문제만도 아니다. 예컨대 전후 공고한 민주주의를 구축하여 유럽 주변국들의 신뢰에 힘입어 통일을 성취한 독일에서도 지난 세기 종반에 정치 내지 정당제도에 대한 불만이 팽배했었고, ‘정치 염증’등의 표제어로 정치학계에서도 수많은 논의가 있었다. 흔히 정치가 신뢰를 상실하게 된 이유는 ‘국민의 뜻’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을 소홀히 한 데 있다고들 말한다. 정치인들뿐만이 아니라 시민들도 자기의 정치적 견해의 타당성을 강변할 때 ‘이것이 국민의 뜻이다’라는 말을 곧잘 사용한다. 그런데 여기서 ‘국민’이란 누구일까? 마치 루소의 “일반의지”의 현실적 구현체와 같은 ‘하나의 국민’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데 문제가 있다. 필요할 때마다 편리하게 소급할 수 있는 ‘국민’이란 실은 결여된 정당성에 대한 알리바이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우리는 국민주권을 민주주의의 기본이념의 하나라고 굳게 믿고 있으며, 거듭된 실망에도 여전히 이 원칙을 포기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정치의 향상을 위해서는 생각의 전환이 긴요해 보인다. 정치는 권력을 추구하나, 권력은 소통을 통한 정당성에 입각한다는 점에서 폭력과 구별된다는 것과, 정치는 ‘하나’의 학문적 진리를 추구하거나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과 관련된 다양한 ‘의견’들이 경쟁하며 자신을 관철하려는 특정한 생활형식이라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학문적 인식으로서의 ‘에피스테메’와 불확실한 의견으로서의 ‘독사’를 구별하고 후자에 대해 전자의 우위를 설파했는데, 이 구별에 의하자면 정치의 자리는 ‘진리’보다는 ‘의견’의 영역이다. 그리고 근대에 대두된 ‘공공성’ 내지 ‘공개성’의 의의는 ‘의견’이 시민들의 ‘공적 심의’를 통해 합리성의 계기를 획득하고 나아가 ‘정당성의 원천’의 지위로까지 격상된 데 있다.

국민주권은 항상 있다고 하면서도 막상 잡으려면 보이지 않는 유령과 같은 존재에 호소하기보다는 공적 심의과정의 합리적 절차에 의거해야 한다. 현대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비공식적인 자유로운 공론영역과 유효한 결정을 내리는 의회와 같은 제도화된 공식적 심의기구에서 이루어지는 이중적인 공적 심의에 기반한다. 국민주권은 이 양자 간의 선순환과정 속에 거주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여의도의 부진’과 ‘타오르는 촛불’은 한 동전의 양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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