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청춘을 말하다 ①

『대학신문』은 총 4번에 걸쳐 우리 시대의 문장(文場)에서 각자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각 세대의 문장(文章)들에게 그들의 청춘을 지탱해줬던 ‘청춘의 문장(文章)’을 물어보는 연재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이를 통해 문인들의 삶과 문학을 들여다보는 통로를 마련하는 한편 오늘날의 청춘들의 삶 또한 지탱할 수 있는 문장을 발견하게 되길 바랍니다.

연재 순서
(1) 김혜순 시인
(2) 성석제 소설가
(3) 심보선 시인
(4) 한유주 소설가


‘청춘’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동반사적으로 나의 입술에 노래 한 소절 머문다. 당연히 산울림 밴드의 「청춘」.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하는 노래. 곶감 빠트린 수정과처럼 청승 짙은 그 노래다. 그 노래를 읊조리다보면, 또 자동반사! 김현 선생님이 들려주신 일화가 잇달아 생각난다.(기억이란 개구멍 많은 창고이면서 각색자가 아닌가. 더구나 청춘의 시기는 최고의 각색 대상이 아닌가. 내가 이 이야기를 들을 때가 청춘이었으니 내용이 조금 달라졌을 수도 있겠다.) 선생님은 어느날 철가방을 든 중국집 배달원과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었는데, 그 배달원이 갑자기 엘리베이터 문에 자신의 몸 전면을 밀착시킨 후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더란다. 청춘이 시작되기도 전인 그 어리신 배달원의 청승에 빠진 자세에 감읍한 선생님은 테이프 앞뒷면을 오로지 산울림의 「청춘」만으로 무단 복사해 자동차 오디오박스에 넣고 듣고 또 듣고 계신다는 얘기였다.

김현 선생님의 테이프처럼 내가 늘 읽고 또 읽었던 글은 김현 선생님의 글들이었다. 당시 나는 유신정권 말기에 긴급조치로 인한 휴강들과 나 자신의 병으로 인한 휴학 등등으로 점철된 텅 비어버린 상자 속에서 분노의 불꽃만 작게 일렁거리는 그런 나날 속에 있었다. 그 때 그렇게 병든 나는 문학 작품들 속에 구현된 나락으로 툭 떨어지는 일들이 허다했는데, 나를 건져서 어느 익숙한 땅위에 상륙시켜준 것이 선생님의 글들이었다. 선생님은 어떤 텍스트든 자신의 변화무쌍하지만 늘 따뜻하며 부드러운 글의 파도 속에 집어넣고 조근조근 띄어주시기에 능했는데, 어찌 보면 칭찬이고 어찌 보면 질책인 그런 양날의 칼날에 저며지는 글들이 숨통이 트이는 진경이 있었다. 이후 나는 계절마다 『문학과 지성』을, 달마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발간되기를 기다렸다. 나는 잡지에 실린 선생님의 이런저런 글들을 읽으면서 선생님의 추천으로 시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급기야는 선생님이 편집동인으로 있는 『문학과 지성』에  그동안 끄적거린 시를 투고하는 만행을 벌이고야 말았다.

「촉각이 도해한 정경」이란 산문 속에서 선생님은 니체의 ‘우리는 히페르보레이들이다…북극의 얼음과 죽음의 저편 언저리에-우리의 삶이 우리의 행복이 있다’는 글을 통해 ‘난파인’혹은 ‘실패인’이란  화두를 적발한다. 그리고 그 화두를 더듬는 과정 속에서 ‘모든 공허한 흔적은 그것이 공허하기 때문에 더욱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난파인은 계속 방으로 들어간다.’, ‘난파인은 무엇인가? 그는 갇힌 것을 아는 사람이다.’ ‘어디에 갇혀 있는가? 기존 질서와 현실과 타인에게’, ‘밖에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탈출하지 않는다.’ 같은 반어적이고 역설적인 명문장을 쏟아낸다. 나는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난파인’이라는 화두를 내 새파란 마음에 접속한다. 그리고 덤으로 문장을 비유의 세계에 투척해 언어의 뒷면을 들여다보게 하거나 언어의 층위를 몇 단계 끌어올리는 글쓰기의 재치까지도 슬쩍 일별한다. 그리고 그가 명한 대로 ‘밖’이 아닌 ‘방’으로 난파하기를 꿈꾼다.

 난파인은 자신의 처지를 백척간두에 실어보는 사람이다. 그런 다음 백척간두의 자리가 파수꾼의 자리처럼 감옥임을, 스스로가 스스로를 가둔 수인임을 발견하게 된다. 발견 후에는 ‘북극과 죽음 저편 언저리’로 자신의 배를 멀리 표류시킨다. 그렇게 이행한 자가 ‘히페르보레이’를 언뜻 보게 될 것이다. 난파가 없는 삶은 숫자를 세며 돼지우리에 사는 삶과 다를 바가 없다. 나는 내 문장의 삶을 난파선에 태운다. 그리고 북극까지, 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공허가 얼어붙은 곳까지, 얼음공주가 눈물로 몸을 녹이는 곳까지, 죽음너머까지 밀고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난파함으로써 ‘시인되기’를 선택해야겠다고 맘먹는다. 그 얼마 후 나의 시를 채택해준 선생님을 처음으로 뵙게 되었다. 막상 파안대소하시는 선생님을 뵈니, 글로는 김현이었던 분이 모습으로는 내 청춘의 감별법으로 볼 때 그렇고 그런 어른인 김광남(선생님의 본명)이어서 ‘허걱’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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