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보다 정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은 시기다. 「사마귀 유치원」, 「나는 꼼수다」를 비롯해 사회와 정치 이슈들을 다루는 다양한 시사콘텐츠가 각종 미디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열풍을 일으킨 이들 시사콘텐츠는 모두 풍자적 표현방식을 이용하고 있다. 이번 기획에서는 각종 시사콘텐츠가 이슈를 전달함에 있어 왜 풍자의 방식을 차용하게 됐는지를 분석하고 나아가 풍자의 한계와 미래를 짚어본다.
 글: 백인영 기자 goodragon@snu.kr 삽화: 선우훈 기자 mrdrug@snu.kr


바야흐로 정치의 시대


지난 6·2 지방선거는 15년만에 선거 투표율 최고치를 경신했다. 뿐만 아니라 온·오프라인에서는 연일 여러 사회·정치적 논의들이 터져 나오고 있다. 바야흐로 정치의 시대인 셈이다. 누리꾼들이 ‘2011 올해의 책’으로 『닥치고 정치』, 『진보집권플랜』 등 시사분야의 책들을 선정한 것 역시 정치에 대한 높아진 관심을 방증한다. 대중은 단순히 관심을 기울이는 데만 그치지 않고 직접 행동으로 이를 표출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반값등록금을 외치며 광화문 광장을 밝힌 20대의 촛불 집회와 정치토크콘서트에 쏟아지는 뜨거운 호응이 바로 그 예다.

 이러한 사회분위기를 반영한 여러 시사콘텐츠는 사회·정치적 이슈를 끊임없이 생산하며 논의의 장을 넓히고 있다. 지난해 4월 팟캐스트에 발을 디딘 「나는 꼼수다」(나꼼수)는 가장 대표적인 시사콘텐츠로 매회 방송을 거듭하며 이제 직접 의제를 설정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와 ‘박은정 검사의 기소청탁 폭로’ 건은 이 방송이 최초로 공개해 화제가 된 사건이다. 「나꼼수」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신드롬을 일으키자 이와 유사한 후발주자들도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다. 「유시민 노회찬의 저공비행」, 「이슈 털어주는 남자」와 같은 팟캐스트 방송에 더해 「뉴스타파」와 「제대로 뉴스데스크」 등 인터넷 방송까지 등장하면서 시사에 대한 논의는 더 이상 기성 언론의 전유물이 아니게 됐다.

 이들 시사 열풍은 비단 인터넷 공간에서 그치지 않고 브라운관까지 확장됐다. 브라운관의 시사콘텐츠는 그 양식이 한결 다양해지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기존의 시사 논의가 「100분 토론」, 「뉴스데스크」 , 「PD수첩」 등 딱딱한 전달에 그쳐 있었다면 현재는 개그 프로그램에서도 웃음을 통해 활발히 각종 시사 사안에 접근하고 있는 양상이다. KBS 2TV 「개그콘서트」에서는 ‘사마귀유치원’과 ‘비상대책위원회’가, SBS 「개그 투나잇」에서는 ‘주간 브리핑’, ‘영상물심의위원회’ 등이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고 비틀며 인기 코너로 주목을 받고 있다. 한편 케이블에서도 시사 프로그램은 주요 콘텐츠로 떠올랐다. 지난 1월 시즌1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tvN의 「SNL 코리아」는 사회 전반의 다양한 시사 이슈를 풍자라는 형식에 담아내 화제가 됐다. 이 프로그램은 콩트가 주가 됐던 풍자의 영역을 토크쇼까지 확장시킨 동시에 다양한 시사 현안을 잘 녹인 것으로 평가 받았다.

시사는 왜 풍자를 입었나

최근 범람하는 시사콘텐츠는 일련의 공통점을 지닌다. 전규찬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 방송영상과·언론개혁시민연대대표)는 “요새 인기를 끌고 있는 여러 시사콘텐츠는 ‘풍자’라는 형식을 빌리고 있다”고 평했다.
 그렇다면 풍자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정치적 현실과 세상 풍조에 가해지는 기지 넘치는 비판적 또는 조소적 발언’. 이러한 정의는 풍자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출전을 통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의 시서인 『시경(詩經)』에서는 “시에는 육의가 있는데 그 하나를 풍(風)이라 한다. 상(上)으로써 하(下)를 풍화(風化)하고 하로써 상을 풍자(風刺)한다.…이를 말하는 자 죄 없으며 이를 듣는 자 훈계로 삼을 가치가 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풍자는 발언을 통해 대상을 우습게 만들고 그것에 대해 조소와 조롱의 태도를 환기시킴으로써 대상과 주제를 깎아내리는 기능을 한다. 풍자란 대상에 대해서는 우행의 폭로, 사악의 징벌이 되는 첨예한 비평이고, 듣는이에게는 조소와 냉소가 되는 웃음의 현상인 것이다.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왜 시사는 풍자라는 옷을 입게 된 것일까.

정치와 대중 사이 거리좁히기

우선 시사를 풍자하는 행위는 웃음을 발생시켜 무거운 정치 영역과 대중 간의 거리를 좁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풍자가 가진 웃음의 지점이 어디서 발생하는지 이해하는 과정에서 대중이 시사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전 교수는 “사회현안을 기성 언론과 다르게 발랄한 방식으로 비판한 것이 시사를 보다 가볍게 느껴지게 했기 때문에 시사풍자가 지금처럼 열풍이 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시사풍자코미디의 대표 주자로 일컬어지는 「개그콘서트」의 ‘사마귀유치원’은 이같이 시사에 쉽게 접근하게 하는 풍자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사마귀유치원은 매주 이슈가 되는 시사 현상을 풍자하고 조롱하면서 웃음을 만들어낸다. 이때 사마귀유치원이 웃음을 유발하는 방식은 화자의 발화와 청자의 이해가 지닌 간극을 이용하는 것이다.

 영국의 과학비평가 아서 케슬러는 이 ‘간극’이 주는 즐거움을 부조화-해소 이론으로 설명했다. 부조화 이론은 웃음이 인지적 차원에 연관돼 있다고 본다. 같은 차원의 인식과 규범을 공유하기 때문에 청자는 화자가 어떻게 말할 것인지 예측할 수 있다. 그런데 화자가 이 예상을 깨고 다르게 말하는 순간 청자는 화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된다. 케슬러는 이 의도를 알게 될 때까지 청자가 심리적 불균형 상태에 놓인다고 말한다. 이 불균형은 청자가 화자의 목적을 읽어낼 때 해소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해소’의 지점에서 웃음이 발생하게 된다.
 
집단모욕죄 고소 사건으로 언론을 한동안 장식했던 ‘국회의원 되는 법’에 관한 개그도 이 양식으로 풀이할 수 있다. 당시 개그맨 최효종씨는 “국회의원이 되려면 집권여당의 수뇌부와 친해져서 공천을 받아 여당의 텃밭에서 출마”하되 ”공약은 말로만 하면 된다”고 일갈했다. 국회의원이 되는 법에 대해 말해주겠다고 최효종씨가 언급할 때, 대중은 선거 운동으로 인지도를 알리고, 지지를 얻기 위해 봉사활동을 하는 등의 모습을 예상하게 된다. 그러나 사마귀유치원은 이 예상과는 다른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대중에게 부조화를 선사한다. 관객이 이 개그 속에 담긴 ‘뼈’를 읽고 부조화를 해소하는 순간 웃음은 터져 나온다.

 여타의 시사풍자코미디는 대부분 이 형식으로 만들어진다. 이들 시사풍자코미디는 웃음이 발생하는 지점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개그 속에서 전달하고자 했던 내용을 관객이 이해해 인지적 부조화를 해소하는 바로 그 지점이다. 시사를 잘 모르는 대중들도 풍자개그가 노리는 웃음포인트는 쉽게 알아내 즐길 수 있다. 본인의 예상과 다른 곳을 찾고 어째서 다른지를 이해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시사를 잘 모르는 대중들도 이 과정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시사이슈에 한 걸음 다가가게 된다.

권력에 대한 저항과 전복

 한편 시사풍자에 담긴 저항과 전복의 가능성이 대중이 욕구와 맞물려 열풍이 됐다는 분석도 있다. 이기형 교수(경희대 언론정보학부)는 “「나꼼수」와 같은 풍자 콘텐츠에 쏠리는 시민의 관심은 정상적인 언론에 대한 갈망과 현재의 권위에의 저항이 맞물린 것이라 볼 수 있다”는 견해를 제기했다. 정치에 대한 대중의 답답증과 불만이 시사풍자콘텐츠에 열광하는 행위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기성 언론은 정치는 공적 영역에 속하며, 이 공적 영역은 엄숙한 것이라 간주해 정돈된 언어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반면 「나꼼수」는 정치는 공적인 것이되, 누구나 스스럼없이 다가갈 수 있는 영역이라고 본다. 나꼼수 출연진 중 하나였던 정봉주 전 의원은 “권위로 인해 무거워진 정치를 가볍고 재미있는 장으로 바꾸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런 「나꼼수」의 인식은 다양하고 자극적인 시사 이슈를 여러 풍자의 양식과 섞여들 수 있게 한다. 이같은 표현 방식은 「나꼼수」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중요한 토대가 됐다.

 4명의 출연진들은 좀 더 쉽게 정치를 이야기하기 위한 수단으로 노골적인 풍자언어를 사용한다. 「나꼼수」의 풍자언어는 웃음, 조롱, 반어 등 다양한 기법으로 이뤄져 있다. 욕설과 고성이 대화의 사이사이에 서슴잖게 튀어나오는가 하면 모든 이야기를 자신에게 연결시키는 정봉주의 ‘깔때기’가 대화의 맥락을 무시하고 나타난다. 카더라 통신과 각종 패러디송이 여기에 끼어들면서 이 방송의 풍자는 보다 노골적이고 적나라해진다.

 「나꼼수」의 풍자적 표현은 프랑수아 라블레의 소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의 그것과 닮아있다. 라블레의 소설 역시 풍자는 민중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당시의 기득권층인 중세 가톨릭교회는 민중들이 전면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비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라블레는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에서 과장되고 익살맞은 문체로 가톨릭교회를 풍자한다. 중세 가톨릭교회의 성스러움과 정숙함은 이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망할 놈의 자식”과 같은 욕설과 “더러운 사제!”와 같은 노골적 표현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미하일 바흐친은 라블레의 소설에서 파괴적이면서도 창조적인 힘을 발견한다. 바흐친은 풍자가 기존의 서사구조로부터 일탈하고 의도적으로 이를 위반함으로써 권력구조를 문란하게 한다고 말한다. 이 과정을 통해 웃음은 단순히 기성 문화를 조롱하는데 그치지 않고 권력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저항과 전복의 속성까지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바흐친은 기존 질서로부터 해방돼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이 가상적 공간을 ‘카니발’이라 명명한 다음 카니발 기간에는 공식적인 권위가 무력화되고 동시에 교란된다고 정의했다. 바흐친은 이 개념을 통해 풍자의 저항적인 성격을 긍정하고 풍자가 기존의 권력을 전복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분석했다.

사진: 길은선 기자 tttkt@snu.kr

카니발 개념은 「나꼼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나꼼수」는 ‘풍자’라는 외피를 두른 채 기존의 질서를 벗어나 정치권력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카니발’의 공간이다. 대중은 이 방송을 듣는 동안 기존의 정치담론을 벗어나 새로운 비평을 접하고 여기서 권력의 해체를 엿보게 된다. 「나꼼수」를 듣는 동안 대중들은 기존 언론과 정치권력에 대한 체념에서 벗어나 기득권의 일방적인 전달체계가 변화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방송 초기 ‘시사풍자토크쇼’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음모론을 제기했던 「나꼼수」는 이제 단순한 흥미 위주의 방송을 넘어서서 정치권력을 면밀히 분석하고 이를 해체하는 대안언론매체로서의 가능성까지 타진하고 있다.
 
시사풍자의 한계, 그리고 우리는


러시아의 문예비평가 루나차르스키는 카니발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카니발 속에서 낮은 계층이 지배계급의 권력을 해체하기는 하지만 이는 결국 지배계급이 쳐놓은 울타리 안에서 일시적으로 울분을 터뜨리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혜경 교수(미학과)는 “미하일 바흐친이 설정한 상상적 공간 내에서 사회적 비판을 해소함으로써 카니발이 넓은 의미에서는 더 큰 폭발을 막는 안전핀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 해소의 과정이 외려 사회적 불만과 저항의 분출을 방지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이는 단지 바흐친이 카니발이 정점에 이른 시기라 규정했던 16세기에만 적용되는 비판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도 이같이 정치적 무기력이 재생산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정치에 관한 담론들이 웃음으로 ‘소비’됨으로써 보다 생산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그라질 수 있는 것이다. 『88만원 세대』의 공저자 박권일씨의 비평도 이 지점에 맞닿아있다. 박권일씨는 시사주간지 「시사IN」에 게재한 칼럼에서 현재 불고 있는 풍자열풍은 “축제 중에서도 힘 빠진 짐승을 칼질하는 쾌락을 제공하는 사육제”라고 언급하며 생산적인 결과 없이 소비되는 정치 담론을 비판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불고 있는 풍자 열풍은 마냥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발전적인 비판을 안고 있다면 대중들의 사회참여를 독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꼼수」의 출연진 김어준씨가 시작한 ‘닥치고 투표’ 운동과 포스터는 서울 시장 선거 때 SNS에서 확산돼 투표율을 높이는데 일조했다. 시사에 대한 거리감이 줄어들자 대중들이 주체가 돼 정치 담론들을 분석하고 풍자한 시사콘텐츠들을 생산하고 있기도 하다

 올해는 현 정부의 집권 마지막 해이자 총·대선이 맞물려 있는 선거의 해인만큼 사회·정치적 사안이 각종 미디어에서 여느 때보다 중요하게 다뤄질 것이다. 따라서 대중과 시사의 연결고리가 되는 시사풍자에 대한 인기도 쉽게 식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봇물처럼 쏟아지는 시사풍자의 홍수 속에서 어떻게 이를 받아들여 생산적인 힘으로 전환할 것인지는 이제 우리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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