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에 조종(弔鐘)을 울리는 자 누구인가
민주주의에 조종(弔鐘)을 울리는 자 누구인가
  • 정진욱 기자
  • 승인 2012.03.17 21: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목, 이 책]

자크 랑시에르 지음ㅣ허경 옮김ㅣ인간사랑ㅣ197쪽ㅣ1만 5천원

‘민주주의’는 오랫동안 우리에게 지향해야 할 절대적 가치였다. 군부 독재 시절, 국가의 주인인 국민이 위협받던 시절에 많은 깨어있는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향한 ‘타는 목마름’에 괴로워하며 ‘닭모가지를 비틀어도 올 새벽’을 애타게 갈망했다. 더구나 수많은 이들의 피와 맞바꾼 민주주의이기에 독재를 타도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낸 6월 민주항쟁 이후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관심이 여전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이러한 우리에게 민주주의를 ‘증오’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낯선 이야기다. 그러나 실제로 민주주의의 위기 내지는 ‘민주주의 폐기론’은 세계의 여러 학자들에 의해 꾸준히 제기돼왔다. 특히 정치적 담론 형성과 논쟁이 활발한 프랑스에서 장 클로드 밀레르, 베니 레비와 같은 학자들은 민주주의의 해악을 ‘과잉’으로 꼽으며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론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여기서 과잉은 대중의 정치 참여 과잉과 무제한적 소비 행태의 과잉으로 나타나는 이중적 과잉이다. 무지한 대중들에 의한 ‘정치 과잉’은 공공선을 파괴하며 방종을 초래하고 ‘소비 과잉’ 역시 재화나 자본에 대한 무제한적 소비로 여러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대중에게 최대한의 권리를 허용하는 민주주의는 ‘문명의 위기’를 내재적으로 갖고 있다는 게 민주주의 증오론자들이 주장하는 바의 중심이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엘리트주의적인 생각일 수도 있겠다.

이들의 주장은 사실 우리에게 그렇게까지 깊이 와 닿지 않는 듯하다. 한국에서는 민주주의의 과잉을 걱정해야 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의 결핍을 고민해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심심치 않게 ‘민주주의 국가가 맞나’하는 의문이 들 법한 이야기들이 매스컴을 통해 들려온다. 정부 기관에서 민간인에 대한 사찰을 자행하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며, 거리에 나온 사람들에게 공권력이 투입돼 지나친 진압을 가하는 등의 이야기는 민주주의의 존재가 위협받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프랑스 비판철학계의 4대 대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자크 랑시에르 명예교수(프랑스 파리8대학)는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민주주의 증오론’에 맞서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를 통해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한다. 사실 이 책은 이전에 한국에 번역 소개된 적이 있었으나 당시 오역 논란에 휘말려 전량 회수됐다. 특유의 난필로 ‘악명 높은’ 철학자답게 랑시에르의 이번 책도 번역이 완전한 편은 아닌 것 같다. 새로 번역돼 출간된 이 책에 대해서도 진태원 HK연구교수(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는 “예전 책에 비해서는 나아졌으나 여전히 학술적 가치로는 부족한 번역”이라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도 독자들이 확실하게 읽어낼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랑시에르의 단호한 목소리다. 그간 자크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를 “기성 권력에 대한 새로운 주체들의 저항을 표현하는 것”으로 정의하며 민주주의에서 대중의 ‘참여’를 역설해왔다. 다른 저서에서 한국의 ‘촛불집회’를 언급하며 이를 민주주의가 적극적으로 구현된 사례로 꼽기도 했던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를 통해 민주주의를 증오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논리에 반박하며 민주주의를 옹호한다.

저자는 ‘민주주의 증오론’은 부당한 공격이라는 입장이다. 증오론자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민주주의가 존재함으로써 생기는 해악이 아니라 오히려 결핍됐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엘리트들의 명석한 주도 아래 지식과 권력, 자본을 계급적으로 구조화하는 집단성을 열정적으로 변호하기 위해 개개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민주주의적 개인주의’에 반대한다. 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는 누구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가능성 즉, 평등에 대한 증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민주주의 체제로 믿고 있는 지금의 정치 체제들이 ‘민주주의’가 아닌 ‘과두체제’라고 덧붙인다. 저자는 “오늘날 지식인들에 의한 반(反)민주주의 담론은 국가 차원의 과두제와 경제 차원의 과두제가 합의해 민주주의에 대한 ‘망각’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는 여전히 소수에 집중돼있는 지배 권력을 은폐하기 위한 연막일 뿐이라는 것이다. “소수 독재자들의 게걸스러운 탐욕” 때문에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과두제적 법치국가에서 살고 있다는 저자의 진단은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 같다.

랑시에르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증오론자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의 탈을 쓴 과두제’가 아닌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움직임’을 필수적으로 요한다. “공공영역에 대한 과두적 정부의 독점을 지속적으로 파괴하는 ‘행위’와 생활 전반에 대한 유산계급의 강력한 영향력을 끈질기게 뿌리뽑는 ‘행동’, 그리고 과두권력과 금권이 야기하는 혼란에 투쟁해야 하는 ‘동력’”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루는 요소라는 것이다.

저자는 “민주주의는 자연에 기초하는 것도, 제도적 장치에 의해서 보장되는 것도, 역사적 필요성의 결과도, 스스로 역사적 필요성을 가지지도 않는 것”이라 말한다. 재산이나 지식 등 특정한 자격 요건을 포장지 삼아 ‘과두제’를 민주주의로 포장하는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권리와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을까. “자신만이 보유하는 고유하며 항구적인 ‘행위’에만 운명을 맡긴다”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위해 이제는 ‘움직여야’ 할 때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