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사태가 발생한 지 꼭 1년이 지났다. 『대학신문』 1825호는 사회면 특집기사를 통해 현 정권 원전 정책의 허상을 꼬집고, 사설을 통해 원전 정책 재검토를 시의 적절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특집기사와 사설이 원전 문제를 정책·산업·기술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는 측면이 강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러한 프레임으로는 원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탈핵 논의가 전문적·기술적 논의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선 4대강 사업에서도 벌어졌듯, 어용 전문가들에 의해 여론이 호도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원전 문제는 전문적·기술적 문제이기 전에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할 윤리의 문제다. 1825호를 보며 후쿠시마 1년이 기사의 ‘시의’가 아니라 성찰의 ‘계기’가 되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특집기사에서 보도했듯, 현재 일본 원전 54기 중 52기가 가동 중단 상태이다. 그러나 기사는 ‘팩트’의 보도에서 그치고 있다. 30%의 전력을 공급하던 원전이 거의 멎었음에도 경제성장률 저하는 겨우 ‘1%’ 정도로 예상되고, 일본 사회는 한국 대통령이 경의를 표할 만큼 침착하다. 이 명백한 사실은 자명한 진실을 함의한다. 일본은 원전 없이 살 수 있었다. 원전이 없었다면 후쿠시마 사태도 없었다. 성찰의 지점이다.

지난 여름, 한 방송에서 절전으로 인한 더위를 이겨내는 도쿄 시민의 모습을 본 적 있다. 회사는 반팔, 반바지 착용을 허용하고 직원들은 책상에 미니 선풍기를 설치했다. 지방 원전에서 생산된 전력 대부분은 도쿄 같은 대도시에서 소모된다. 문득, 고작 도시의 쾌적한 여름을 위해 후쿠시마가 그런 위험을 떠안고 있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열매를 누린 자들이 책임을 지는 것은 윤리적으로 마땅하다. 소수와 약자에게 책임을 강요하고 열매는 다수와 강자가 누린다면, 그것은 폭력이다. 그 상황이 불가피하지 않을 때, 그것은 자명한 폭력이다.

또 유출된 방사능에 노출되는 세대는 후쿠시마의 열매를 누린 세대가 아니라, 거의 누리지 못하거나 누려본 적도 없는 세대다. 남의 나랏일이 아니다. 현재 한국 21개 원전에 보관 중인 폐연료봉은 무려 ‘1,500만개’가 넘는다. 폐연료봉은 후쿠시마 방사능 누출의 원인이다. 폐연료봉은 임시로 쌓아두는 것 외에 현재 처리할 방법이 없는 상태다. 이전 세대가 누린 쾌적과 편리의 폐기물인 폐연료봉을, 그다음 세대가 처리비용과 위험을 지불해야 한다. 이것은 착취다. 착취는 비윤리적이다.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관심을 이어온 『대학신문』이기에, 이러한 윤리적 성찰의 부족이 더 아쉽게 다가온다.

기사는 건조한 문체로 독일이 2022년까지 ‘탈핵’을 선언했다고 보도하고 있지만, 그 과정엔 치열한 윤리적 성찰이 담겨있다. 탈핵은 정부나 정치권을 통해서가 아니라 ‘17인 윤리위원회’를 통해 이뤄졌다. 위원회에는 과학자뿐 아니라 사회학자 울리히 벡, 가톨릭 주교 울리히 피셔 등도 포함됐다. ‘탈핵’은 이들이 10시간 넘는 TV 생중계 토론을 포함한 치열한 토론 끝에 내린, 기술적·정책적 결론을 넘어서는 ‘윤리적’ 결론이었다. 『대학신문』이 앞으로 날카로운 사실 보도를 넘어 치열한 윤리적 고민도 담아내길 기대한다.

이대한
생명과학부 석·박사통합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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