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청춘을 말하다 ③

 

삽화: 김태욱 기자 ktw@snu.kr

연재순서
(1) 김혜순 시인
(2) 성석제 소설가
(3) 심보선 시인
(4) 한유주 소설가

 

현재 경희사이버대 문화예술경영학과 조교수로 재직중이다.

멋지게 살려하지 말고 무언가를 이루려 해라
아버지와 막스 베버의 충고

 


내 삶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말이 하나 있긴 있는데, 이 말은 책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 말은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입에서 나왔다. 내가 대학생이었던 어느 날, 아버지는 술에 취해 내게 말씀하셨다. “멋지게 사는 건 너무나 쉽다. 하지만 뭔가를 이루는 것 그게 정말 어렵고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멋진 사람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말이다. 나는 인생에서 이룬 것이 하나도 없다. 아들아, 나는 실패자다. 명심해라. 멋지게 살려하지 말고 무언가를 이루려 해라.” 나는 이 말을 듣고 꽤 충격을 받았다. 나는 어떤 말로도 아버지를 위로할 자신이 없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 있었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 냉정히 평가를 하고 분명한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자신의 삶 전체에 대해 평결을 내릴 수 있는 대심문관은 오로지 자기자신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 당신의 삶 전체에 대해 성공이니 실패니 운운했다고 치자. 당신은 좌절하거나 기뻐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은 그 말을 신뢰할 수 없다. 그 누가 당신의 삶 전체를 속속들이 알 수 있는가? 당신 자신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때 나는 아버지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룬 게 하나도 없다니. 아버지는 직장도 있고 자식들을 모두 대학에 보내지 않았는가? 아버지의 말을 온전히 이해는 못했지만 아픈 진실 하나는 알게 되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한 인간으로서 매우 슬픈 존재라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나는 대학원 시절에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하고 아버지가 한 말을 나의 방식으로 이해하게 됐다.           

존경하는 청중 여러분! 학문 영역에서는 순수하게 자신의 주제에 헌신하는 사람만이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괴테같이 위대한 인물에 있어서 마저도 감히 자기의 ‘삶’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 만들려고 했던 시도는 최소한 그의 예술에는 부정적 영향을 끼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괴테 정도는 되어야 감히 그런 시도나마 해볼 수 있는 것이며, 심지어 수천년에 한번 나타날 괴테 같은 인물마저도 이 시도에 대한 최소의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만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학문의 영역에서는 아래와 같은 사람은 분명 ‘개성’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헌신해야 할 과업의 흥행주로서 무대에 함께 나타나는 사람, 체험을 통해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사람, 어떻게 하면 내가 단순한 ‘전문가’와 다른 어떤 존재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나는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는 그런 방식으로 무언가를 말할 수 있을까, 라고 묻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개성’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태도는 오늘날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는 어디에서나 천한 인상을 주며 또 그렇게 묻는 사람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위의 이야기는 마치 아버지가 베버의 입을 빌어 시를 쓰고 사회학을 연구하는 내게 하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은 학자와 작가들이 스스로를 하나의 작품처럼 ‘멋진 사람’으로 세상에 드러내려 하는가?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자신의 업적을 세상에 뽐내려 하는가? 중요한 것은 개성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예술과 학문의 주제에 헌신하는 것이다. 성취란 헌신의 결과이지 개성의 증명이 아닌 것이다. 베버와 아버지의 영향력 아래에서 나는 성실성을 지표로 삼아 연구를 해나갔다. 나는 오래된 신문, 책, 문서들을 파고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하였다. 온갖 종류의 자료, 증언, 담론, 이야기의 물결들로 이루어진 대양을 항해하여 어느 낯선 해변에 가까스로 당도하듯 석사논문과 박사논문을 완성했다.


그런데 나는 글을 쓰면 쓸수록 주제에 대한 헌신을 강조하는 베버의 학문관에 동의하지 않게 되었다. 여전히 베버의 학문관은 아버지의 말씀과 더불어 나의 글쓰기를 윤리적으로 감시하고 판단하는 심문관 역할을 한다. 내가 나를 포함한 모든 이의 글쓰기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는 바로 성실성이다. 그러나 나는 베버와 아버지 모두에게 할 말이 있다. “아버지, 그리고 베버 아저씨. 멋지게 사는 것과 뭔가를 이루는 것 말고도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요?” 베버와 아버지는 멋진 삶과 성실한 삶을 분리한다. 그런데 이 분리에는 모종의 비극성이 있다. 그 비극성이란 삶을 오로지 개인의 고독한 여정으로 보는 자의 자기 환멸 혹은 자기 극복의 파토스다. 삶과 글쓰기를 고독한 작업으로 보는 이들이 자기도취에 빠지지 않고 가치 있는 결과물을 만들려할 때 선택하는 윤리적 태도가 바로 잘 훈육된 열정으로서의 성실성이다. 그러나 나는 글을 쓰면서-그것이 시건 혹은 논문이건-깨닫게 되었다. 내가 선택하고 빠져드는 대상은 단순히 주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인간들의 눈물, 탄식, 좌절, 눈물, 환호성, 기쁨, 경탄이 어려 있는 세계라는 것을, 그리하여 내가 이 세계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세계를 부각시키는 것이고, 그 세계와 연루된다는 것이고, 그 세계에 참여한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아버지와 베버가 말하듯 삶과 글쓰기는 고독한 작업으로 시작하여 고독한 작업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 출발과 회귀 사이에는 고독한 여정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몸과 영혼을 뜨겁게 하고, 내 가슴 속에서 말을 들끓게 하고, 나의 손발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단순히 주제의 흥미로움이 아니라 바로 동시대인들의 삶이고 그 삶에 섞여드는 사물들의 동시대적 운동이다. 베버와 아버지는 삶과 예술, 삶과 학문을 분리시키라고, 그것을 하나로 합치려는 시도는 위험하다고, 지나친 열정을 잘 다스려서 성실성으로 바꾸라고 말했다. 나는 베버와 아버지의 충고를 받아들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삶에 이끌린다. 친구들과 연인과 동시대인이 살고 있는 삶에 매혹된다. 나는 삶과 일, 삶과 작품 사이를 쉼 없이 오간다. 돌아가신 이들의 충고와 살아 있는 이들의 부름 사이를 쉼 없이 오간다. 나의 말과 행동, 나의 기쁨과 슬픔은 그 사이 어디에선가 태어나고 소멸하고 다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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