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 송호근 교수(사회학과)

삽화: 김태욱 기자 ktw@snu.kr
마테오 리치 지음ㅣ송영배 외 옮김ㅣ서울대학교 출판부ㅣ1999년 출간ㅣ520쪽

오래 전 대학시절, 무방비 상태의 대학생에게 밀려오던 수많은 질문 속에 이런 궁금증이 있었다. 유교적 가치와 생활 방식에 젖은 한국에 왜 성당과 교회가 저리 많은가? 불교사찰이 깊은 산 속에 유배된 것은 조선의 배불정책 때문임은 알겠는데, 그것이 해제된 갑오경장 이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동학농민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1894년 가을, 조선에 입국한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 여사 역시 그런 질문을 던졌다. 오백년 도읍지 한양에 종교사찰이 하나도 목격되지 않은 것이 의아했던 것이다. 경복궁 좌우에 종묘와 사직단이 설치된 것을 조선 초행자가 알 리 만무했지만, 그래도 십이만 인구가 밀집된 한성부에 일본처럼 신도는커녕 아무런 종교시설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인류 보편사의 틀림없는 예외로 비쳐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 영국의 석학이 궁금증을 푸는 데에 그리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모든 민가가 종교시설이었던 것이다. 양반과 소민(小民) 할 것 없이 별도로 모셔둔 위패가 바로 종교였다. 유교는 오백년 조선인의 신앙심을 관할했다.

그러나 유교는 내세관이 없는 현실 종교였다는 점이 특이하다. 유교는 현실의 도덕과 윤리를 관장하는 예제이자 세계관이었는데 그 원칙은 하늘의 궁극적 진리(天理)에서 도출된다고 믿었다. 하늘이 궁극적 진리이자 만물의 기원이라는 이 믿음을 바탕으로 천리와 천도(天道)를 구축했던 것이 유교였다. 퇴계가 어린 선조에게 그려준 『성학십도』의 첫 그림이 태극도이다. 천리와 천도로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는 군주의 십계명이 알기 쉽게 풀이된 지침서였다. 그렇듯, 그것은 사대부 즉 지배계급의 종교였다. 고경 독해의 능력을 갖춘 사대부에겐 성리학의 태극관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지만, 무지한 인민들은 하늘의 종교적 의미를 아무리 강조해도 신심의 갈증을 채우지 못했다. 인민들은 민속과 주술신앙으로 그것을 달랬다. 백여 가지도 넘는 귀신 명부에 비숍 여사가 매혹되었던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조선인민들은 자신들의 공포와 바람을 각종 귀신들에게 의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인민들에게 서교(西敎)가 출현했다. 그 맹아는 사실상 양반 계급에게서 발아되었는데 종교가 아닌 학문의 형태로 접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북경에 파견된 부경사행원들에 의해 반입된 서학서는 거의 360여종에 이르렀는데, 그 중에 『천주실의(天主實義)』가 끼여 있었다. 문자 그대로 ‘천주의 실제 의미’라는 뜻으로 예수회 소속 신부 마테오 리치(利瑪竇)가 1603년에 저술한 저서이다. 이 새로운 책을 권력에서 밀려났던 남인계열의 학자들이 돌려보았는데, 그 와중에서 자발적 교인이 탄생했다. 이벽, 양반가문의 자손이자 다산 정약용의 절친한 친구였던 이벽은 이 책을 읽고 개종을 결심했다. 최초의 천주교도가 태어난 것이다. 그는 ‘천주공경가’를 언문으로 짓기도 했고, 친구들을 불러모아 교리연구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1779년 천진암 주어사에서 교리연구 모임이 최초로 열렸다.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이승훈과 이벽이 당대 최고의 학자인 정다산, 권철신에게 『천주실의』를 강의했을 것이다.

『천주실의』는 마테오 리치가 직접 한문으로 쓴 서학서이다. 마테오 리치는 매우 명석한 청년 신부였다. 광대한 동양 대륙에 천주교를 전파하려면 중국인의 신심 구조와 논리 체계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10여년을 중국 경전 연구에 바쳤다. 그는 중국의 성리학을 설파한 끝에 그 전반적 체계가 천주교와 흡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성리학의 ‘天’은 비인격적 우주인데 반하여, 천주교가 섬기는 창조주는 인격적 신이라는 점이다. 현명하고 영리했던 마테오 리치는 유교의 궁극적 원리가 비롯되는 상제(上帝)를 하늘의 주인이라는 뜻의 천주(天主)로 개념화했다. 상제를 천주로 교체하여 개종의 문턱을 낮춘 것이다. 마테오 리치는 유교를 훼손하지 않고 포교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상제를 천주로 표기하고 만물창조와 운영의 기원으로 정의하면 수많은 중국인들이 천주교도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그러나 그의 영리한 바람은 중국이 아니라 조선에서 실현됐다.

서양선비(西士)가 중국선비(中士)를 설득하는 대화체로 쓰인 『천주실의』의 초점은 태극설을 천주설로, 즉 무의 공간인 하늘에서 유가 비롯된다는 우주관을 바꾸는 데에 있었다. 성리학이 사물의 근원으로 설정한 태극은 서양의 경험론과 실증론에 입각한 마테오 리치에게는 ‘아무 것도 없는 것’ 또는 허공(nothingness)으로 보였다. ‘허공에서 만물이 어떻게 비롯되는가?’라는 서사의 질문에 중사는 답을 못한다. 서사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만물은 하늘에서 비롯되는데, 그 ‘천’은 바로 천주다. 천주는 누구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 아니고 그 자체 천지를 기르고 주관하는 ‘지극히 위대한 소이연(所以然)’이다. ‘그 소이연은 누가 만들었나?’라는 중사의 질문에, 그것은 ‘원초적 소이연’이어서 그 위에 누구를 상정할 수 없다는 서사의 대답. 서사는 아예 만물의 분류 도표를 그려 중사 설득에 나섰다. 사물의 범주를 실체(자립자)와 속성(의뢰자)으로 구분하여 실체에서 속성이 나온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파했다. 만물의 소이연인 하늘은 속성이 아니라 실체여야 하는데, 태극은 허공이 아니라 천주라는 인격체여야 한다는 것, 천지만물에는 원주가 존재하고 그것이 상제로서 천주라는 것, 천주는 도와 덕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도덕의 근원이라는 것을 논했다. “우리(서양)의 천주는 바로 (중국의) 옛 경전에서 말하는 ‘하느님’이다.”

허공 속의 상제가 인격신으로 대체된 천주는 중국인들보다 조선인의 마음을 파고 들었다. 한반도에 천주교도들이 속속 생겨났다. 조정의 박해를 피해 심심산중에 교우촌이 형성됐다. 이 벽지산촌을 밀입국한 프랑스 신부들이 찾아다녔다. 1866년까지 12명의 프랑스 신부가 참수되었다. 1779년 주어사에 모였던 회원들은 모두 참수형에 처해졌다. 정다산의 맏형 정약현도 참수당했고 그의 사위 황석영은 그 유명한 백서 사건으로 참살되었으며, 그 자신도 중형 정약전과 남도로 유배길에 올랐다. 이후 일만 오천명에 달하는 신자들이 참형을 당했다. 서강 나루 절두산이 신자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1896년, 피어린 절두산 모래로 만든 벽돌로 명동성당이 건축됐다. 종루에서 퍼진 최초의 타종이 유교의 붕괴와 종교의 자유를 만천하에 알렸다. 한반도에 성당과 교회가 속속 들어선 배경에는 『천주실의』가 놓여 있는 것이다. 오랜 궁금증이 조금은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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