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한편] 영화 「비기너스」

 

삽화: 김태욱 기자 ktw@snu.kr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영상학과 박사과정 수료. 현재 영화진흥위원회 객원연구원으로 있다. 동성애자인권연대 활동가로서 인터뷰집 『후천성 인권 결핍 사회를 아웃팅하다』(2011)를 기획하기도 했다. 논문으로는 「한국 남성 동성애 영화에 나타난 재현의 윤리학」,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퀴어다움을 찾아서」(공저), 「야오이를 전유한 동아시아 남성 동성애 영화 재고」 등이 있다.


영화 「비기너스」에서 할(크리스토퍼 플러머)은 아내의 죽음으로 마침내 44년간의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커밍아웃을 한다. 당시 그의 나이는 75살. 아무래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기에는 버거운 나이처럼 보이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누구보다 활기차게 동성애자로서의 삶을 즐긴다. 그의 하나뿐인 아들 올리버(이완 맥그리거)도 아버지의 뒤늦은 커밍아웃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영화는 할의 죽음 직후 그를 회고하는 올리버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일반적으로 커밍아웃 스토리를 담은 영화에서 커밍아웃의 순간이 담고 있는 강렬한 파토스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격앙시키곤 한다. 그리고 그 후에 벌어지는 가족 간의 갈등과 반목, 화해와 용서가 극의 흐름을 이끌어 간다. 반면에 「비기너스」에서 할의 커밍아웃은 영화 도입부에 올리버의 회상 속 재현이라는 중화된 방식으로 건조하게 묘사된다. 게다가 올리버의 내레이션은 당시의 고조된 감정이 아니라 할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할은 서로 다른 옷을 번갈아 입으며 커밍아웃을 반복한다. 그렇다. 커밍아웃은 가볍게 희화화된다.

 용기내 커밍아웃한 가족을 나머지 가족 구성원들이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쿨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대세인 시대가 오고 있음의 반증일 수도 있다. 이제는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알 필요가 있다. 감독이 궁극적으로 건네고 싶은 이야기는, 커밍아웃이라는 사건을 가족들이 관계의 위상과 과거의 기억을 재정립하면서 다시금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는 것이다. 커밍아웃을 자신의 성장을 위한 윤리적 계기로 삼는 것이다.

 

 올리버의 감정이 점차 고조되는 순간은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가, 조금 남달랐던 어머니와 재차 조우하면서부터이다. 올리버가 정말 이해하고 싶었던 존재는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아버지의 커밍아웃으로 그는 어머니의 외로움과 거기에서 비롯된 이상야릇한 행동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순간, 어머니의 깊은 외로움이 그를 엄습한다. 그리고 어느새 그런 어머니와 닮아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 영화의 또 다른 미덕은 개인의 상처와 함께 시대의 아픔까지 보듬고 있다는 것이다. 할의 기억 속에는 동성애자 억압과 해방의 역사가 그대로 아로새겨져 있다. 할은 13살 때 자신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치료’를 위해 정신과를 찾았다. 동성애가 질병이었던 시대의 불운한 초상이다. 그는 남성을 향한 성욕을 억누른 채,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으며 이성애자 남성의 삶을 평생 연기했다. 그리고 틈틈이 영화는 메타친 클럽, 하비밀크, 무지개 깃발, 게이 프라이드 행진 등의 굵직굵직한 동성애자 인정투쟁의 사건들을 스틸컷과 자료화면으로 삽입하면서 관객들의 이해를 돕는다.

 영화는 ‘두번째 커밍아웃’으로 감정을 폭발시킨다. 할은 아내가 자신이 게이인 줄 알면서 먼저 프로포즈했다는 사실을 올리버에게 털어놓았다. 그녀는 할의 동성애를 자신이 고쳐주겠다면서 청혼을 한 것이었다. 할은 아내를 속인 것이 아니다. 그 말을 믿고, 아니 그 마음에 감동한 아버지는 결혼을 했고 끝까지 아내를 믿으며 가족을 지켰다. 어머니 역시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힘든 결혼 생활을 이어나갔다. 동성애에 억압적인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부부의 초상이다. 모두가 피해자일 수밖에 없는 그런 시대의 좌절감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과거 아버지 세대의 게이들은 화장실에서 사랑을 찾고 섹스를 했다. 올리버는 자신이 그럴 필요가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행복한 이성애자라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리버와 그의 연인 애너(멜라니 로랑)는 마음을 활짝 열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사랑을 하기가 순탄치 않다. 불현듯 찾아오는 원인 모를 슬픔에 눈물 흘리며 자꾸만 서로를 밀어낸다. 사랑하기에 더없이 자유로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어린 시절 보아온 부모의 쓸쓸한 결혼생활이 무의식 깊이 각인돼 결혼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기가 쉽지 않다. 올리버는 게이인 아버지가 겪었을 고통에 공감하고 죽은 어머니의 뼈저린 외로움을 가슴 깊이 애도하며 사랑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씩 극복한다.

 이처럼 「비기너스」는 커밍아웃 당사자가 아닌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가족의 입장에서 전개되는 영화이다. 커밍아웃을 계기로 과거로 회귀하며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사건들과 행동들을 뒤늦게 납득하며 가슴을 내리친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과거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어루만지고 스스로를 한 뼘 더 자라게 한 다음에야 비로소 상대방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보다 성숙하게 관계를 맺어나갈 수 있다.

 

 

◇ 영화 「비기너스」(2010): 마이크 밀스 감독의 드라마 영화. 일러스트 작가 올리버는 평범한 삶을 꿈꾸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가 죽은 뒤 커밍아웃하는 충격을 그에게 안겨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암으로 세상을 떠나버린다. 일련의 혼란이 가시기도 전에 그는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프랑스 여배우 애나와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사랑이 생각보다 어려워 당황스러울 뿐이다. 영화는 이처럼 많은 트라우마로 좀처럼 인생도, 사랑도 쉽게 시작하지 못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잔잔한 감동으로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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