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카리브해를 주름잡았던 해적왕 드레이크는 스페인 상선들에게는 도적이었지만 영국인들에게는 영웅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드레이크를 해군 부제독으로 임명했다. 훗날 드레이크는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운다. 이처럼 모호했던 해적과 해군의 경계는 근대 국민국가가 등장하면서 명확히 구분되기 시작한다. 합법적 조직만이, 즉 정당성과 공익성을 인정받은 조직만이 폭력을 독점하게 된 것이다. 

국민국가의 등장은 국가 개념을 완전히 전환시키게 된다. 태양왕 루이14세처럼, 그전까지 국가는 왕과 등치됐다. 그러나 이제 공적 권위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아니라 전체 시민으로부터 발생하게 된다. 카페에서의 의견 교환으로부터 출발해 언론의 발전으로 이어진 공론장의 형성은 시민들의 공적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했다. 공론장의 원칙은 공개성이었다. 구성원 모두가 알아야 하고 모두가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로부터 국민주권을 지향하는 공화주의가 시작된다.  

국민국가가 형성된 이후, 민족주의의 부흥과 전쟁의 증가는 군대의 중요성을 더욱 높이게 된다. 국가 안보가 절대적 목표가 되는 상황에서 강병은 최우선 과제였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군부는 점점 더 영향력을 키우게 된다. 군부가 국가 운영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 근대 일본의 경험이라면, 근대 프랑스는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된다. 그 계기가 바로 ‘드레퓌스’ 사건이다. 한 개인의 유/무죄로부터 시작된 논쟁은 국가가 지향해야 할 가치와 그 과정에서의 원칙에 대한 논쟁으로 발전했다. 공화주의를 지켜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은 1898년,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이었다. 그는 국가권력은 정당성을 가질 때에만 성립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이에 프랑스 군부는 거꾸로 그를 명예훼손으로 사법 고발한다. 최후진술에서 그는 군대의 명예는 군부의 명예와 같을 수 없으며, 군대가 수호해야할 것은 국가 이익이 아니라 진실과 정의임을 강변했지만, 유죄를 선고받고 만다.

최근 한국에서는 국가기관과 시민이 법적 다툼을 벌이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공적 권위의 명예와 정책의 정당성이 공론장이 아니라 재판정에서 결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특히 세계적으로 독특한 현상인 점은 국가기관이 주체가 돼 시민을 고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기관이 국민과 분리돼 독자적 개체로 의사결정 과정에 개입하게 된다면, 모든 시민들의 의견이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하며, 시민들의 의견으로부터 국가의 의사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공화주의의 원칙이 지켜질 수 없다. 또 국가기관의 명예와 정당성이 자신이 담보하는 기능으로부터 원천적으로 주어진다고 자임하는 순간, 공론장은 오히려 국가권력을 관철시키는 공간으로 쇠락하게 될 것이다. 

국가의 근거를 국민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국민을 국가의 권위에 동일시하게 만드는 것. 그런 풍경은 통치자의 초상화에 대한 훼손이 최고존엄의 모독이라며 전 국민이 감정적 동요를 보이는 북녘과 데칼코마니처럼 닮아있다. 한반도에 아직 공화주의는 시작되지 않았다.

 김경근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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