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바람 속 분노의 목소리
속속 드러나는 각종 비리들
악전고투 속 민주주의 앞에
우리는 왜 분노해야 하는가

올해가 종말의 해라더니 과연 종언을 고하는 언어들이 물결친다. 각종 지면, 인터넷 댓글, 출마자들이 운영하는 트위터를 비롯해 눈길을 두는 곳마다 심판을 요구하는 단죄의 목소리가 넘실거린다. 총선을 앞두고 본격적으로 선거 운동이 시작되면서 일대 절정을 맞은 정치 바람 속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화두는 아무래도 ‘분노’다. 1%에 대한 99%의 분노, ‘미친 등록금의 나라’에 고하는 청년들의 분노, 공정보도를 외치며 사장 퇴진을 요구하는 언론인들의 분노를 비롯한 셀 수 없는 많은 공분(公憤)의 기억들을 돌아보면 2012년 현재 대한민국 사회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은 가히 ‘분노’라 이름할 만하다. 그러나 분노에 동참하고 있으면서도 무시로 이 단어에 적잖은 피로감과 비애를 느끼는 것은 나뿐일까.

요즘 트위터를 자주 한다. 타임라인을 따라 직접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분노의 목소리들 사이에는 조롱과 풍자도 더러 섞여 있다. 때로 냉소적 어조로 주조된 그 언어들에서 웃음 뒤에 가려진 처연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때 느끼는 처연함은 무심하게 내뱉는 그 모든 조롱의 언어들이 이제는 더이상 분노할 기력이 남아있지 않은 자들의 할 말 잃은 허탈한 한숨이자, 그래도 여전히 살아있다는 생존 신고처럼 느껴지는 까닭이다.

물론 민주주의를 일으켜왔던 것은 분노다. 오랜 역사 속에서 분노는 억압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 동원이자 더 나은 삶을 향한 개혁의 첫 얼굴이었다. 다만 지금, 분노에 대한 피로감이 유독 극심하게 느껴지는 것은 혹여 진부해질까 걱정이라도 하듯 날마다 새롭게 업데이트되는 부정부패의 막대한 양적 공세 때문이다. 최근 KBS 파업 기자들에 의해 입수·공개된 민간인 사찰 문건이 사찰 사실 그 자체로도 모자라 묵혀져 있었던 각종 비리들이 끊임없이 발굴되는 유적 역할을 하고 있다. 속속 들춰지고 있는 사실들이 모두 실제 유물이라면 실로 놀라운 고고학적 성취라 할 정도다. 상식적인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분노할 만한 것들을 판별하고 그를 이끌어내는 ‘분노계’가 있다면 무더기로 쏟아지는 비리 소식에 과부하가 걸려도 한참 전에 걸렸다. 요즘 대세라는 음모론을 적용해보자. 혹시 이것은 분노에 기력을 모두 소진해 말할 힘도 없는 국민들을 만들 누군가의 원대한 계획인 걸까?

그러나 아쉽게도 이것이 누구의 계획이든 이미 실패한 것 같다. 분노에 대해 느끼는 지금의 피로감은 ‘살려면 분노해야 한다’는 막중한 부담을 처음 마주한 당혹감과도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내가 분노하지 않으면 ‘삶의 위협’이 당장 내 앞에 직면할 것이라는 서늘한 실존적 자각! 이처럼 지금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분노의 감정이 최소한 ‘삶’을 유지하기 위한 악전고투에서 발로한다는 인상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분노의 핵심에 있는 ‘몸통’들은 실제로 시민들의 생존과 행복을 위협하며 거리를 활보한다. “내연녀와 과자 3봉지를 샀다”, “오다가 맥주 한 병을 떨어뜨려 깨졌다”처럼 증권가에서 돌아다닌다는 선전지 속에 있을 법한 내용이 국무총리실에서 작성된다. 대형 참사로도 이어질 수도 있었던 아찔한 원전 사고는 얼마간 감쪽같이 은폐됐다.

아무리 분노에 지쳐있다 해도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존엄이 걸려있는 일에 마냥 무기력할 사람들은 없다. ‘머리’ 없는 몸통이라는 기괴한 형상의 공권력이 시민이 부여한 바로 그 힘으로 시민들을 옥죄는 사회에서 느끼는 비통함. ‘원대한 계획’의 주체들은 결국 이 아연실색한 황망함과 희망 없는 정권에 대한 슬픔을 동력이 떨어진 분노로 착각했다.

그러므로 분노는 지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 잠깐의 비애와 피로는 변혁을 위한 더 큰 분노로 결집될 것이다. 지금 분노가 지치기에 삶과 시민의 존엄은 너무나 소중하고 그들은 지나치게 몰염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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