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김한나 개인전: 「일상생활의 승리」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했던가. 88만원 세대인 ‘한나’는 청춘이 처한 힘겨운 현실의 한가운데 놓인 존재다. 팍팍한 삶 속에서 그녀를 달래주는 것은 바로 가상의 친구 ‘토끼’다. 캐릭터 스누피로 유명한 만화 「피너츠」에서 라이너스가 담요를 끌고 다니며 마음의 안정을 얻듯, 한나는 토끼와 서로를 갈구하며 위안을 얻는다. 이들의 일상을 그린 김한나의 개인전 「일상생활의 승리」가 오는 29일(일)까지 소격동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열린다.

전시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주민들의 안부인사가 스피커를 타고 가장 먼저 들려온다. ‘학교는 졸업했니? 취직은 했니?’라고 웅얼거리는 동네 사람들의 물음 앞에서 한나와 토끼의 소소한 하루는 작아지고 만다. 사회는 일관된 기준을 쏟아내며 맞추기를 요구하지만 한나는 토끼와 함께 작은 일상을 영위하면서 이를 차근차근 이겨나가려 한다.


「내 통장」(2011)은 그런 그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푸릇한 회색 배경 속에서 한나와 토끼의 시선은 통장에 고정돼 있다. 캔버스의 구도는 오롯이 인물에 맞춰져 관객은 한나가 쥔 통장과 그녀의 표정에만 집중하게 된다. ‘평생’통장에 돈을 조금씩 모아나가는 한나에게서는 쓸쓸함과 성취감이 뒤섞여 나타나는 듯하다. 토끼는 이 위태로운 88만원 세대를 끌어안으며 다정한 눈길로 위로한다. 세밀하게 묘사돼 현실성이 강조된 통장과 동화적인 색채로 둥글하게 그려진 토끼가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있는 듯 오묘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이번 전시는 비단 회화뿐 아니라 비디오와 드로잉 등 다양한 기법을 사용한 작품들로 꾸려져있다. 「게으름 바라보기」(2010-2012)는 조소작품과 나무사다리를 독특하게 진열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설치미술이다. 한나는 가방을 쥐고 운동화를 신은 준비된 모습으로 멈춰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뒤에 놓인 사다리로 살짝 시선을 돌리면 토끼가 높은 꼭대기에서 같은 곳을 올려다보는 중이다. 작가는 이들이 쳐다보는 대상을 ‘게으름’이라 지칭했다. 하지만 게으름을 바라보는 한나와 토끼의 시선에 부러움이 묻어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엔 오히려 일상생활에 덕지덕지 배어있는 게으름을 떨치고 한 걸음씩 세상으로 내딛으려는 의지가 담겨있다.

김한나 작가는 이번 개인전에서 바쁜 시대를 살아내느라 지친 88만원 세대를 파스텔 톤의 환한 색감으로 위로하고자 했다. 일기처럼 담담하게 이어지는 전시작들을 둘러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관객에게도 토끼 한 마리가 다가와 속삭인다. 사회가 바라는 지침에 무작정 맞추기보다 저축이나 운동처럼 소소한 일상생활부터 하나씩 함께해 나가자고. 그게 바로 푸른 새싹같이 싱그러운 청춘(靑春)이 일상에서 맛볼 수 있는 진정한 승리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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