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 이 책] 『리얼 유토피아』

에릭 올린 라이트 지음ㅣ권화현 옮김ㅣ들녘(코기토)ㅣ516쪽ㅣ1만 8천원

이야기 하나. 소설가 김애란은 대한민국의 평범한 20대 도시 여성의 내면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단편소설 「큐티클」에 등장하는 여성 화자도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열심히 살아보려는 그저 그런 부류의 인간형이다. 직장으로 출근하는 그녀는 ‘발을 헛딛지 않을까’ 불안해하면서도 ‘7cm 하이힐’이 주는 싱싱한 긴장감이 자신을 훨씬 ‘그럴 듯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 사물의 실용적 가치보단 ‘도시 여성’이라는 이미지의 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주의 체제의 논리를 주인공은 ‘커피의 로스팅 방법과 원두 종류에 따라 미묘하게 다른 향들’을 소비하고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이란 소설’을 한번쯤 읽어주는 방식으로 재생산한다.

이야기 둘. 월스트리트 점령이 시작된 지 어느새 6개월이 지났다. 우울한 경제 상황에 대한 절망은 시스템에 대한 분노로 번졌고 분노는 금융자본의 메카인 뉴욕 월가에서 폭발했다. 분노는 곧 전 세계로 퍼졌고 진보적 지식인들은 너도나도 시위를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난 지금, 완강한 경찰력에 가로막혀 참가인원은 줄어들고 있고 주변에서는 ‘점령해서 뭘 어떻게 하자는 거냐’는 냉소가 깊어지고 있다.

다른 듯, 같은 두 이야기다. 체념하고 일상으로 침잠하든, 분노하며 시위를 하든 자본주의 자체를 변화시키기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더러운 현실에 침을 뱉고서도 이내 다시 ‘발을 헛딛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면접 시험을 보러가는 이 시대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 김애란의 소설에서, 그리고 월가의 시위에서 겹쳐진다.

삽화: 김태욱 기자 ktw@snu.kr


지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자본주의의 돌파구를 찾는 일련의 서사 속엔 이미 사라진 줄 알았던 마르크스가 강렬한 ‘희망’의 언어로 다시 구사된 바 있다. 체제의 구조부터 건드리는 그의 언어는 ‘더러운’ 현실을 모두 바꿔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급진적 좌파가 곧 맞닥뜨린 것은 ‘합리적 시장’에 대한 끈끈한 믿음의 고리들이었고 체제 변혁을 위한 혁명적 전망은 이내 사라졌다. 목적지를 잃은 분노와 익숙해진 무력감만이 거리를 부유했다. ‘대안을 찾자’는 구호마저 체제 안정화를 위한 ‘친절한’ 관용어구로 전락해버렸다면 그것은 지나친 비관론인가.

그럼에도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남았다고 말하기 위해선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리라. 『리얼 유토피아』는 당돌하게도 ‘사회주의 나침반’을 자청하며 체제 변혁을 위한 올바른 방향과 적절한 시기를 모색해보자고 제안한다.

자본주의의 변혁을 꾀하는 이들에게 마르크스의 언어는 분명 강력한 유혹이다. 그의 세계엔 도덕적으로 거부하고 싶지 않은 ‘유토피아’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불평등이 해소된 평화와 조화의 세계가 역사의 궤도 끝에 필연적으로 있을 것이라는 결정론적 사고가 가미되면 마르크스의 언어는 더욱 매력적으로 고양된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이는 순진할 정도로 단순하고 위험하다. 미래에 대해 어떤 확실한 지식도 가질 수 없는 인간이 제한된 시간 내에서만 타당할 수 있는 인과적 설명을 바탕으로 역사의 방향을 ‘예측’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가능성’의 영역에 머무를 뿐이다. 역사에 필연은 있을 수 없고 의도치 않은 결과는 늘 등장할 수 있다. 반인륜적 행태를 보인 전체주의 국가와 국가 관료주의에 함몰됐던 소련의 경험이 가르쳐준 것은 고정된 청사진에 대한 맹목적 추구가 언제든 다양한 인간 주체들의 욕구를 말살할 수 있다는 교훈이었다. 칼 포퍼의 말을 빌리자면 그러한 사회과학은 ‘과학’이 아니라 ‘주술적’ 예언이고 저자는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며 이를 거부한다.

마르크스의 언어를 부분적으로나마 극복했다면 저자는 왜 다시 자신의 지적 프로젝트를 리얼 ’유토피아’라 이름 붙였을까. 유토피아와 ‘리얼’ 유토피아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읽어낼 필요가 있다. 유토피아는 너무나 완벽해서 변할 필요조차 없는 완벽한 꿈 그 자체다. 그래서 성취될 수 없다. 오직 우리가 미래의 모든 사건들과 그 사이의 인과관계를 통제할 능력을 갖출 때 유토피아는 성취가능한데, 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고정된 ‘꿈’을 성취할 수 있을 때까지 이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사회가 마냥 기다려주지는 않는다. 반면 ‘리얼’ 유토피아는 각자의 정치적 의지와 믿음이 적절한 사회적 조건하에서 발현될 때 실제로 성취될 수 있는 사태를 뜻한다. 그래서 ‘리얼’ 유토피아는 성취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주체들이 어느 정도의 의지를 갖고 있는지, 그리고 의지가 발현된 사회적 상황이 어떤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물론 저자의 궁극적 목표는 자본주의를 넘어선 민주평등주의적인 ‘사회주의’의 실현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회주의’는 반드시 거대한 시스템의 붕괴를 수반할 필요는 없다. ‘사회주의’를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폐기된 체제’로 정의내리는 순간 그것은 제도의 정교화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저자에게 ‘사회주의’는 시민사회의 권력(사회권력)이 국가권력과 자본권력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체제로 정의된다. 이로써 사회권력을 강화할 수 있는 일련의 크고 작은 제도들이 모두 사회주의적 경로로 포섭된다. 자본의 논리를 벗어나 시민사회가 직접 지식을 창출하는 위키피디아나, 노동자들을 생계로부터 자유롭게 해 노동에 대한 실질적 자유를 보장해주는 보편적 기본소득제도 모두 사회권력을 강화시켜줄 성취 가능한 사회주의적, 민주적 경로다.

저자의 입장은 확실히 체제 붕괴를 통한 변혁을 꾀하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에 비해 온건하고 점진적이다. 그가 목표하는 변혁은 사적 소유권과 국가 기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고 주로 제도적, 의식적 차원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는 초월적, 공상적 유토피아에 반(反)한다는 전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가, 법, 이데올로기, 문화 등 자본주의 내의 구조와 제도들이 능동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안정시킬 수 있다는 재생산 메커니즘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나름의 전략이기도 하다.

가령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대의민주주의는 사회주의 정당들을 딜레마에 직면하게 한다. 만약 그들이 실질적인 정치적 압력을 가하기 위해 선거에서 이기고자 한다면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와 타협점을 찾아 중간계급의 표를 끌어와야 하고 이는 이따금 자본 축적을 촉진하는 정책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반면 이를 피한다면 정치적으로 주변화돼 체제 변혁을 이끌 실질적 힘이 약해진다. 대의민주주의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재생산하는 기제로 작동하는 것이다. 변혁을 향한 전략은 이러한 재생산 메커니즘의 틈새에서 시작된다. 사회적 기제인 이상 자본주의 재생산 메커니즘에는 반드시 한계 혹은 모순이 존재한다. 이 틈새에 자본의 권력을 약화하고 사회권력을 강화할 제도를 설계하는 것이다.

아직 구체적인 전략과 제도들을 얘기하지 않았지만 모두 한번쯤 ‘해볼 만’해 보인다. 변혁을 이야기하면서 이토록 냉철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저자는 조목조목 각각의 논리와 근거를 따진다.

지금 ‘분노’의 언어는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 혹시 정작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처절한 자기고백에 머물러있진 않은가. 이 시점에 필요한 것은 희망이 ‘리얼’할 수 있다는, 그러한 언어다. 유토피아가 ‘리얼’하다는 증명. 당신의 세번째 이야기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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