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학전문대학원
나는 지난 2009년 여름의 평택을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짧은 외침으로 기억한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리지 않고, 사측의 부당한 정리해고에 맞서 77일간의 옥쇄파업을 벌였다. 아스팔트를 달구던 그 해 여름 햇살은 특히나 더 따가웠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그렇게 느꼈던 것은, 전쟁터를 방불케 하던 그 평택 하늘에서 쏟아져내렸던 것 중에는 햇살뿐 아니라 최루액도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2009년의 그 여름은 아직도 살아남아, 바쁜 일상 속에서 잊어버릴만 하면 다시 그 존재를 상기시킨다. 며칠 전 또다시 평택발 비보가 들려왔다. 스물두번째 쌍용차 해고 노동자의 죽음이다.

 옥쇄파업 후 96명이 주동자로 구속되었고, 노조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과 가압류가 이어졌다. 반면 징계철회 및 해고자 복직 등의 합의사항은 회사 상태가 아직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이행되고 있지 않다. 해고로 인한 생활수단의 박탈, 농성이 가져온 정신적 · 육체적 스트레스, 폭력적인 진압이 남긴 트라우마는 해고 노동자들로부터 일체의 삶의 조건을 앗아갔다. 그리하여 정리해고 이후 22명의 해고 노동자 및 가족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병으로 숨졌다. 지나간 과거가 사람을 계속해서 죽여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 노동자들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라는 주장을 자주 접한다. 죽음을 야기한 직접적인 원인이 명백히 드러나 있지 않아서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그 책임을 지울 때 자주 쓰이는 표현이다. 그런데 사태를 조금 더 명확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무엇이 이 노동자들에게 노동의 대가로 생존이 아닌 그 정반대의 대립물인 죽음을 안겼는가? 사람들이 뉴스도 안 보고 쌍용차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전혀 무관심해서 해고노동자가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던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쌍용차가 법정관리에 들어가고 뒤이어 옥쇄파업이 시작되었을 때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던 것은 쌍용차 주식 가격이었다. 쌍용차 문제는 결코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버려져 있던 이슈가 아니었다. 이 노동자들은 무관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승리를 원하지 않는 세력들과의 죽느냐 마냐의 싸움에서 패배해 죽음으로 떠밀린 것이다. 그것이 사태의 핵심이다.

 지난달 중순에 가산디지털단지역 근처에서 있었던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조촐한 강연회에 다녀왔다. 그때 김 지도위원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고공농성이 계속되던 중 어느 날, 한진중공업 사측과 경찰이 84호 크레인을 85호 크레인 옆으로 옮겨 붙여서 농성자들을 끌어내리려 했는데, 그것을 보면서 “아, 저들이 우리 크레인으로 오면 정말 뛰어내려야겠다.”라는 생각이 바로 들더라는 것이다. 냉소적인 이들은 여기에서 어떤 소영웅주의를 읽어내고 코웃음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 전에 적어도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생산과 풍요를 제1원리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고 하지만, ‘삶’을 위해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어떤 사람들이, 노동의 대가로 죽음을 품에 안게 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생산과 풍요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곧 총선이 있다고 한다. 학교를 오가는 길에 후보자들의 유세나 홍보하는 선거운동원들을 심심치 않게 마주친다. 그들이 그렇게 던져 달라고 외치는 투표용지 한 장과, 이 스물두번째 해고노동자의 죽음 사이에서 나는 문득 가슴이 먹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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