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은 조선시대부터 물산의 집하장이자 도성 방위를 위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러던 것이 1882년에는 청나라군의 주둔지로,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는 일본군의 주둔지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용산 일대 300만평을 선정해 연병장 및 사격장 등으로 활용하려 했는데,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을 배상금으로 책정해 논란을 빚었다. 배상금이 평당 2전 꼴로 당시 신문 1부의 가격인 7전에도 못 미쳤던 것이었다. 당연히 해당 주민들은 반발했고 일본 역시 당연하다는 듯 헌병을 동원해 이들을 진압했다. 결국 합의 및 보상이 완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1906년 4월부터 기지 건설이 강행됐다. 그리고 이로부터 1945년까지 용산은 대륙 침략을 위한 일제의 전진기지로 활용됐다.

일본군이 사용하던 용산 기지는 해방 후 미군이 착실히 물려받았다. 청나라에서 일본, 그리고 미국까지 100년 이상 용산은 외국군에 의해 점거당해 있던 셈이다. 2004년에 이르러서야 용산 미군기지 이전 계획이 발표됐고, 미군이 평택으로 이전하면 용산 기지 부지에 평화생태공원이 들어선다고 했다. 미군기지로 단절됐던 남산과 한강을 잇는 열린 생태공원이라니 그동안의 용산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꿈만 같은 얘기였다. 그런데 최근 한국 정부가 기지 이전 비용의 절반만 부담한다는 발표가 실은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원래 미군이 낸다고 알고 있었던 나머지 비용 마련을 위해 민자 투자를 받아 공원 안에 용적률 최대 800%의 40~50층 되는 고층 빌딩들을 세운다는 것이다.

한편 또 다른 용산에서는 여전히 3년 전 일어났던 일들이 반복되고 있는 듯하다. 지금도 용산역 앞에는 ‘갈 곳 없는 철거민 여기가 무덤이다’와 같은 플래카드들이 살벌하게 걸려 있다. 용산참사의 진상도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는데 후속 조치에 기대를 걸었던 게 잘못일까. 지난해 6월말 발의된 ‘용산참사 생존자, 구속철거민 석방 및 특별사면 촉구결의안’은 아직까지 법사위에 상정조차 되지 않은 상태다. 망루에 올라서야 했던 사람들은 감옥에 있고, 그들을 망루로 내몰았던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총선에 나간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최근 개봉한 영화 「화차」는 자신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괴물 같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한 여자에 대한 슬프고도 무서운 이야기였다. 스포일러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의 배경이 하필 용산역이었다. 그녀는 용산역 안에 있는 쇼핑몰을 도망쳐 달리다 결국 옥상 주차장에서 몸을 던졌다. 이에 대해 영화감독은 “마지막 신, 용산이 배경이다. 그곳이 얼마나 비정한 곳인지 사람들은 알 거다”라고 설명했다. 용산은 더 이상 하나의 지명만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용산을 생각한다, 괴물을 만들어내는 비정한 사회의 상징이 제발 사라지길 바라며. 

안지영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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