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우리나라 실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받는 조선 후기의 사상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의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유네스코가 다산 정약용 탄생 250돌을 ‘2012년 유네스코 관련 기념일’로 선정하는가 하면, 국내에서도 학계와 문화계, 출판계 등 여러 분야에서 다산과 조선 후기 실학에 대해 재조명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정약용은 대중에게 친숙한 인물이며 학계에서도 그의 업적과 사상에 대해 많이 조명해왔다. 다산은 실학자, 저술가, 시인, 철학자, 과학자, 공학자이며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학자로 알려져있다. 그가 남긴 업적만큼 정약용에 대한 수많은 논문이 나와 있지만 지금까지의 연구가 지나치게 다산을 단편적으로 이해해왔으며 다산의 전체적인 사상을 조망하지 못했다는 목소리가 있다. 다산을 있는 그대로의 ‘다산 정약용’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글: 정진욱 기자 jjo524@snu.kr  삽화: 김태욱 기자 ktw@snu.kr  



과학자 정약용?


지금까지 다산을 이해해온 대표적인 축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과학기술’이다. 정약용은 조선에서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몇 안 되는 학자로 알려졌다. 그러나 정약용을 서양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과학자’로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물론 다산이 과학기술에 대한 사상과 업적을 남겼지만 이것이 실제 다산의 사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해보면 과도하게 부각된 측면이 있다. 이는 ‘서구의 과학이 곧 근대화’라는 잘못된 인식에서 출발한다. 서양의 과학기술에 개방적이었던 다산을 과학자로 묘사함으로써 조선 역시 근대적인 요소를 지녔다는 점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다산은 과학 분야 연구를 통해 주자학이 강조했던 실용 정신을 자신의 넓고 탄탄한 학문적 기반을 바탕으로 구현하는 것을 추구했다. 일례로 다산은 좋은 기술자와 장인을 우대해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내백공(來百工)’의 주장을 펴기도 했다. 정약용은 ‘기술자들이 오게 하는’이라는 뜻을 지닌 내백공 정책을 통해 농기와 수레 등을 편리하게 만들고 이를 활용해 교역과 농사가 성하게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중용(中庸)』 14장의 구절, ‘백공이 오면 재용이 풍부해진다(來百工則財用民)’는 구절을 주해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정약용이 자연현상과 과학기술에 주된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김영식 교수(동양사학과)는 “정약용은 기본적으로 유학자로서 유가 전통을 유지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며 “그러한 그에게 자연세계와 과학기술은 부수적인 관심의 대상일 뿐이다”고 말했다. 그가 과학기술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유교 중에서도 어느 정도의 ‘실용성’을 기본으로 하는 주자학에 입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산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근대 서양의 방식이 아니라 철저히 유교적인 관점에서 과학기술에 접근했다. 그가 주장했던 여러 과학기술 진흥책들 역시 유교 경전에서 나온 구절을 재해석하고 주석을 단 것이지 우리가 생각해온 것처럼 혁신적으로 서양의 과학기술 자체를 적극 들여온 것은 아니었다.

결국 다산을 자연현상이나 과학기술을 연구한 연구자로 보기는 힘들다. 다산이 서양 과학지식의 구체적인 내용을 일부 받아들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서양의 과학지식 체계 전체를 받아들이거나 서양 과학지식을 자신의 사상 체계 속에 담으려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과학기술뿐 아니라 연구자들은 지금껏 다산을 그의 정치사상, 법사상, 행정사상, 경제사상, 토지제도 개혁론 등 분과학문 단위로만 접근할 뿐 조각난 분야별 사상들을 아우른 다산 사상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밝히려들지 않았다. 이렇듯 그의 사상 체계의 전체 맥락을 조망하지 않은 채 지엽적인 부분부분으로 파편화해 다산을 이해하는 경향은 각 연구자 혹은 그 사회가 요구하는 지식인상을 다산에 쉽게 덧입히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정약용을 둘러싼 동상이몽


이처럼 정약용에 대한 연구가 단편적으로 진행된 이유는 무엇일까. 다산의 학문 중 각 시대·사회적 맥락에 합치되는 일부 사상을 다산의 전체 사상인 것으로 포장해온 경향이 지금까지도 어느 정도 남아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근대화 과정에서 다산을 추어올리는 것은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식민사관(植民史觀)을 강조했던 일본 학자들과 이를 저지하고자 했던 민족계열의 사학자들은 다산 사상의 근대적 측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학자들은 불법적으로 조선을 침탈한 것을 숨기고 자신들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일본 학계에서는 조선 백성들에게 식민사관을 주입하고자 했다. 식민사관은 일제가 조선을 원하는 대로 쉽게 통치하기 위해 조작한 역사관으로 한민족은 역사적으로 스스로 설 수 없는 정체(停滯)된 민족이라는 것을 우리 민족에게 세뇌하고자 한 것이었다. 일제 사학자들은 조선이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발전되지 못했다는 점을 부각하기 위해 조선 전체를 ‘암흑’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러던 중 그들은 조선의 전근대성을 문제시하면서 조선 사회를 개혁의 대상으로 바라봤던 ‘실학(實學)’에 주목했다. 여러 실학자 중에서도 일본 학자들은 실학을 집대성한 19세기 실학자 정약용을 훌륭한 학자로 칭송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역사학자 아사미 린타로(淺見倫太郞)는 “반도에 있어 이조 최후의 학자로 정약용을 지닌 것은 표장할 만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학파와 정약용을 조선이 낳은 훌륭한 사상가로 칭한 이러한 일본 학자들의 시각 저변에는 식민사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의 조선 사회가 지닌 문제점을 저서를 통해 낱낱이 고발했던 다산을 위대한 인물로 위치시킴으로써 조선 사회의 미개발성, 정체(停滯)성을 더욱 잘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는 식민사관을 공고화하기 위한 일제의 의도가 내포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단 일제만이 다산을 강조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의 민족주의 사학자들 역시 일본의 식민사관에 대응하기 위해 다산의 사상을 발굴해냈다. 1930년대 일본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조선어와 조선 역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하는 등 ‘민족말살 정책’을 폈다. 이러한 시기를 타개하고 조선인들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는 한편 그들을 계몽하기 위해 안재홍, 정인보, 문일평 등의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의 사학자들은 다산 서거 98주년(1934년)을 기념해 본격적으로 정약용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다산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완간함과 동시에 다산 서거 100주년 기념사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후 그들은 다산 연구에만 그치지 않고 이를 ‘조선학 운동(朝鮮學 運動)’으로 확대·전개했다. 조선학 운동을 통해 민족주의 계열 사학자들은 조선의 고유한 문화를 학문화하고자 했다. 조선학의 시각에서 바라본 ‘실학’은 1930년대의 현실에서 계승할 만한 가치로 삼기에 충분했다. 실학은 근대화 과정을 거치지 못해 조선이 발전하지 못했다는 일본의 주장에 맞서 조선 사회에서도 일본이 말하는 ‘근대적 요소’가 존재해왔다는 점을 드러낼 수 있는 증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재목 교수(영남대 철학과)는 그의 논문에서 “1930년대 당시 정약용은 조선의 탁월한 위인이자 조선학 운동의 정신적 기폭제로서 인식됐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당시 다산은 식민지 공간에서 정법(政法)과 문화건설(文化建設)의 실제적 여망을 담은 인물로 독자성과 내실을 겸비한 최고의 학자로 간주됐다”고 덧붙였다. 일제의 식민사관 논리를 반박함과 동시에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할 목적으로, 다산의 사상 중 전근대적인 사회로 이해됐던 당시 사회를 비판한 개혁론을 크게 부각한 것이다.

이렇듯 일본 학계와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정약용과 그의 사상을 자신들의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해석·활용했다. 일본은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은 이러한 일본의 조선 지배가 부당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조선은 발전 없이 정체돼있던 나라라는 주장을 타파하기 위해 다산과 실학자들의 개혁적인 부분을 강조하다보니 결과적으로 조선 사회를 지나치게 폄하하게 된 것이다. 정약용의 개혁론이 크게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다산이 개혁의 필요성을 느낀 당시 사회에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결국 이는 일본이 내세웠던 ‘조선시대는 전근대적이며 발전이 없었다’는 식민사관을 당시 조선의 사학자들도 어느 정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한영우 명예교수(국사학과)는 이를 두고 “민족주의 독립 운동가들의 목표와 식민주의 일본 학자들의 식민사관이 실제로는 공존하고 있던 아이러니”라고 말했다.


다시, 정약용의 탄생을 위해



그렇다면 역사·사회적 맥락에 의해 가공된 정약용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다산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일표이서(一表二書)’를 해석하고 그의 구체적·현실적 사회 개혁론을 깊이 있게 연구하는 데 힘을 쏟아왔다. 일표이서는 『경세유표(經世遺表, 1817)』, 『목민심서(牧民心書, 1818)』, 『흠흠신서(欽欽新書, 1822)』의 세 저작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다산에 대한 연구가 그가 제안한 제도를 중심으로 많이 이뤄졌던 이유는 다산이 정치·경제의 개혁에 관심을 많이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조선인 역시도 조선 후기의 사회적 모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제도 개혁론이 중심이 되는 실학이 조선 사회의 지배담론이었던 성리학과 전혀 다른 새로운 학풍은 아니다. 공리공담만을 논하던 당시 성리학의 반대급부로서 실학을 바라보는 것은 실학 등장 이전의 성리학이 ‘허학(虛學)’이라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다. 이전의 성리학과 비교해 실학의 구체성과 실용성을 강조하는 것은 성리학적 질서가 공고히 자리잡고 있던 조선 시대 전반을 발전이 없었던 암담한 시기로 치부하는 식민사관과 겹칠 여지가 있다.

과연 성리학은 공리공론을 논하는 반면 실학은 구체적인 현실을 논하는 것일까. 정일균 교수(사회학과)는 “모든 학문은 이론적인 부분과 실용적인 부분이 함께 들어있는 것”이며 “이론과 실용을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그는 “다산 역시 18년의 유배 기간 중 15년이 넘는 세월을 자신의 개혁안의 사상적 바탕을 견고히 하기 위해 유교 경전을 다시 읽고 연구하는 데 바쳤다”며 “실제 『여유당전서』의 70% 이상이 제도 개혁을 위한 이론을 다루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는 우리가 흔히 공리공론을 펼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 성리학에도 학문을 이루는 사변적 요소와 실생활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는 실용적 요소가 모두 들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실학에도 현실적인 제도를 고안해내기 위한 사상적 토대가 되는 형이상학적 요소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즉 정약용이 다양한 개혁안을 내놓을 수 있었던 데에는 성리학적 세계관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바탕이 돼있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결국 다산이 내놓았던 여러 사회 개혁안들은 그의 유교 경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오랜 고민에 따른 산물이라는 사실을 무시한 채 조선 후기의 사상사를 ‘성리학 vs. 실학’으로 단순화해 이해한다면 다산의 전반적인 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이에 정일균 교수는 다산의 구체적인 경세학(經世學)을 그의 사상적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경학(經學)적 측면과 함께 다뤄야 한다고 역설했다. 경세학은 학문적 사상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방법을 논하는 학문이고, 경학은 유교 경전에 주석을 달며 그 의미를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정 교수는 “경학은 경세학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근거고 경세학은 경학이 표현하는 세계관에 사회적 조건이 결합한 구체적 형태이기 때문”으로 경세학과 경학을 함께 다뤄야 하는 이유를 밝혔다. 경학과 경세학의 관계는 학문이 다루는 세계관과 그러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현실화돼 나타나는 제도의 조응성을 띤다는 의미다.

한영우 교수 역시 “지금까지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다산의 사상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적인 업적을 연구하는 데 치중해왔다”며 이러한 연구의 경향성에서 벗어나 “다산을 총체적이고 다각적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결국 실학은 본질적으로 형이상학적 사변 대신 실제로 얼마나 활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학문이 아니라 유교 경전을 통해 얻은 사변을 바탕으로 사회에 접목시키려 했던 유교의 한 종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그동안 알려져왔던 실학이라는 개념을 재조정함으로써 당시의 사상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다산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정일균 교수는 ‘조선 후기 남인 계열 학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됐던 사회 개혁적인 학문, 다산 정약용이 집대성한 것으로 알려진 그 학문’을 ‘실학’이라는 표현 대신 ‘탈주자학’으로 표현하자고 주장한다. 실학 대신 ‘탈주자학’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실학이 새로운 학문이 아니라 유학의 한 종류임을 강조한 것이다.

조선 중앙 정계 세력이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바뀌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중원에서 새로운 권력이 재편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의 지식인 사회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정통 주자학을 재확인하고 강화하는 흐름과 대안적 학문을 모색하는 탈(脫)주자학의 흐름으로 나뉘게 된다. 정 교수는 실학 역시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하고자 했던 탈주자학의 흐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에 따르면 다산은 심(心)·성(性)·정(情)을 중심으로 인간 존재의 양상을 다룬 심성론(心性論)이나 상복 착용 기간 등과 같은 예론(禮論)을 둘러싼 논쟁에 열을 올리는 당시의 ‘조선 주자학’이 주자학 본연의 모습은 잃어버렸다고 여겼다. 그래서 정약용은 현실 개혁을 주장하기 위해 본래의 모습이 변질된 조선의 주자학을 비판하며 탈주자학적 경학체계를 쌓았고 그렇게 구축된 다산의 경학 사상체계는 오늘날에 이르러 ‘실학’이라 불리고 있다.

다산은 동아시아 유교사에서 큰 사상적 업적을 이룬 학자다. 명·청대의 유학과 일본의 유학에 이르기까지 다산의 유교에 대한 논의 범위의 포괄성과 수준의 심도성은 우리나라에서 뿐 아니라 당대의 동아시아 전체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높은 수준을 자랑해왔다. 그러나 다산 사상의 대부분을 이루는 이러한 경학적 측면을 배제한 채 그의 경세학적 사상에만 집중하는 것은 다산을 ‘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잘못’ 이해한 것에 가깝다. 이제까지 다산을 가려왔던 ‘실학’이라는 잘못 만들어진 프레임, 각 사상을 조각내 살펴봐 왔던 단편적인 연구법에서 벗어날 때에서야 비로소 깊이 있는 경학적 사유를 현실화한 ‘진짜’ 다산을 만날 수 있다. 그래야만 정약용은 탄생 250주년이 지난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에서 의미있는 ‘재탄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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