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편적인 다산 이해의 또다른 사례는 북한에서 정약용을 바라봐 왔던 시각에서 찾을 수 있다. 남한에서 정약용이 국민들의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고 조국 근대화를 표상하는 지식인이었다면 북한에서는 유물론적 요소를 강조해온 북한 사회의 특성상 오랜 시간 정약용은 봉건체제를 혁파하고자 했던 개혁가의 키워드로 설명됐다.

북한에서는 남한보다 먼저 정약용에 주목했다. 다산학 연구의 대가인 최익한(崔益翰)이 월북해 그의 대표 저작인 『실학파와 정다산(1955)』을 펴냄으로써 분단 이후 북한이 다산학에 대해 앞서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던 것이다. 북한이 다산에 주목했던 이유는 다산이 주장했던 여전론(閭田論)*, 균민주의(均民主義)*, 인식과 비판에서의 유물론적 요소, 문벌 타파 등이 당시 북한이 내세웠던 사회주의 정책과 맥이 닿아있다는 점을 크게 부각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정약용을 부각한 것은 민족주의와 함께 이뤄졌다. 최익한은 그의 책에서 실학을 ‘사상, 학설이 그 시대의 역사발전과 인민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실리와 실용성 있는 학문’으로 정의했다. 그는 이러한 실학의 정의 위에서 정약용을 ‘실학을 완성시킨 대성자’이며 ‘민주주의적 반봉건사상’을 지닌 인물로 평가한다. 정약용이 부각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민족적 유산을 찾아 이를 계승·발전시켜 나가자’는 김일성의 교시가 있었다. 김일성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몇 차례에 걸쳐 선조들이 남겨놓은 물질적·정신적 유산을 마르크스-레닌주의적 견지로 분석해 당의 사상을 강화하자고 주장했다.

김일성의 민족전통 중시 교시 이후 1960년대에는 이러한 분위기가 더욱 고조됐다. 1962년 『정다산: 탄생 2백주년 기념논문집(탄생 2백주년 기념논문집)』에서는 정약용을 ‘유물론적 철학세계를 수립’하고 ‘사회발전에서 생산력의 발전이 미치는 주요한 역할에 착안한 진보적 사상가’ 등으로 평가한다. 이는 다산의 관념론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언급했던 최익한의 평가보다 더욱 긍정적인 방향으로 묘사된 것이다. 월북학자이자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교원이었던 김석형 사회과학원 원장은 다산을 ‘조선의 마르크스’로까지 치켜 세웠다. “정약용의 빛나는 생애와 선진사상과 학문적 업적은 오직 조선노동당의 올바른 과학문화정책에 의해서만 정당하게 구명될 수 있었다”고 밝힌 『탄생 2백주년 기념논문집』의 서문은 결국 정약용의 사상 연구가 조선노동당의 노선을 사상적으로 공고히 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1969년을 기점으로 ‘조선의 마르크스’로 추앙받던 정약용은 ‘관념론적 복고주의자’로 전락하게 된다. 이는 김일성이 ‘사회과학의 임무에 대하여’라는 교시에서 “지금까지 우리 학자들이 실학자들이 내놓은 이론들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는데 이들의 역할을 무시해서는 안되지만 과장하여서도 안된다”는 내용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1972년 조선사회과학자대회에서 “지난날의 진보적인 사상과 문화를 무원칙하게 과대평가하는 경향과는 강하게 투쟁해야 하겠다”는 김일성의 교시 역시 영향을 미쳤다. 이는 종파주의 척결과 사회주의 전면건설이 일단락된 후 주체사상을 유일사상화, 김일성을 우상화하던 시기와 맞물려 이뤄졌다. 이후 발간된 『경제사전(1970)』, 『력사사전(1971)』에서는 “다산의 기본적인 사상은 어디까지나 봉건 지배계급의 입장이며 전통적 유교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혹평했다.

1980년대에는 다산에 대한 연구가 이전에 비해 많이 누그러진다. 실학의 역사적 의의를 과소평가해 왔다는 데 대한 북한 학계의 자성적인 목소리를 반영한 것이다. 『조선철학사상사 개요(1979~1983)』에서 “실학사상을 농민들의 반봉건적 투쟁과 결부시키지 못한 것은 치명적 약점”이라고 언급하는 한편 “실학은 봉건시대 말기의 애국적 사상조류이며 개화사상으로의 다리 역할을 한 진보적 사상”이며 “봉건제도의 붕괴를 촉진해 미약하게나마 긍정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유초하 교수(충북대 철학과)는 “이러한 재조정의 핵심은 다산의 의의를 봉건제도 자체를 부정하지 못하는 한계 속에서 자본주의적 요구를 반영한 것으로 보는 관점의 정립에 있다”고 평가했다.

북한에서의 다산학 연구 변천에 대해 유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교시나 지침에 따라 연구가 진행되는 북한의 경우 그 지침과 지침을 정하는 소수의 집단이 내리는 판단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고 말했다. 또 유 교수는 틀에 짜인 북한의 유물사관에 대해 “모든 철학을 유물론 아니면 관념론으로 규정하고, 시대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유물론과 관념론이라는 틀을 모든 철학적 사유체계에 적용하는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북한과 남한은 누구 할 것 없이 각각 당시의 시대 상황상 자신들에게 필요했던 면모, 그들의 노선과 부응하는 다산의 면모를 강조하기 위해 다산의 일부 사상을 조각으로 이해해왔다. 그러나 서로의 시대와 사회가 요구했던 프레임을 벗어던진다면 있는 그대로의 다산을 바라볼 수 있는 날이 곧 올 수 있지 않을까.

*여전론(閭田論): 『여유당전서』의 「전론(田論)」에 담긴 토지제도. 30호 정도를 하나의 여(閭)로 구성한 후 여의 경계 내에 있는 토지를 여민(閭民)들이 공동소유·경작하고 노동량에 따라 생산물을 분배하기를 주장한다.
*균민주의(均民主義): 모든 백성들이 어느 계층을 막론하고 빈부와 정치적 권리, 노동 등을 균등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균민주의 사상으로부터 지배층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는 위민정치(爲民政治) 사상이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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