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방영 중인 드라마 「무신」은 최씨 무신정권 시기의 실존인물들을 바탕으로 한 전통사극이다. 각본대로라면 이 드라마는 노비 출신의 주인공 김준(김주혁 분)이 최고 권력자가 되기까지의 ‘드라마틱한’ 과정을 다룰 터인데, 실제 김준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한국고전번역원(http://www.itkc.or.kr)’이 제공하는 ‘고전 종합 DB’에서 ‘김준’을 검색하면 다음의 구절을 찾아볼 수 있다. “(김)준이 권세를 전횡하고 스스로 방자하여, 일찍이 (몽골에) 사신을 보내는 데 나라의 선물을 충당하려고 부민들의 금과 은을 가혹하게 거둘어들이니, 많은 백성들이 근심하며 원망하였다”(『동사강목』 제11상) 연인을 구하기 위해 목숨까지 걸었던 김준을 보고 가슴 아파했던 시청자라면 다소 허탈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고전 종합 DB’는 고전을 콘텐츠로 다루는 방송국 PD나 영화감독이 작품을 기획할 때 애용하는 중요한 자료 소스다. 한류 열풍을 일으켰던 드라마 「대장금」역시 고전번역원에서 번역한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했고 KBS 「역사스페셜」의 장영주 PD 역시 하루에 두세번은 꼭 고전번역원 사이트에서 자료를 확인한다고 한다. 소설, 드라마, 영화 등 문화산업 전반에서 일고 있는 ‘고전 열풍’의 저변에 한문으로 쓰인 고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학계뿐 아니라 사회 일반에서 그 중요성이 점차 증대하고 있는 고전번역 사업의 현황과 앞으로의 과제를 모색해본다.

 
고전번역의 구심점, 한국고전번역원

현재 국내 고전번역 사업의 중심에는 ‘한국고전번역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고전번역을 본격적으로 진행한 기관은 1965년에 출범한 ‘민족문화추진회’인데 이를 발전적으로 계승한 기관이 바로 한국고전번역원(고전번역원)이다. 물론 세종대왕기념사업회를 비롯해 여타 기관에서도 번역작업을 해왔지만 대부분의 번역을 담당하는 기관은 고전번역원이었다.

 고전번역원은 민족문화추진회 시절부터 2011년까지 총 145종 1,333책을 번역·출간했다. 지금까지 파악된 고전번역 문헌이 총 4,174여권임을 감안하면 고전번역원의 번역작업이 총 분량의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처럼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된 국고문헌뿐 아니라 그 외에도 번역 가치가 있는 문집들을 선별 및 정리·간행·표점·번역한 『한국문집총간』역시 고전번역원의 성과물이다. 게다가 연구자와 일반인이 인터넷으로 쉽게 고전을 활용할 수 있도록 역대 번역 성과물들의 84.7%를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해 놓았으니 가히 고전번역원은 한국을 대표하는 고전번역기관으로 명실공히 자리매김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직 할 일이 더 많다

고전번역원을 중심으로 번역사업이 내적 발전을 이뤄가고 있으나 아직 갈 길이 멀다. 우선 번역돼야 할 문헌들이 너무나도 많이 산적해 있다는 사실. 규장각에 소장된 고문헌만 하더라도 11만4천여권에 달하고 세계 각국에 흩어져 소장된 것만 8천여권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을 포함해 현전하는 고문헌이 모두 180만점에 달한다고 하니 지금까지 번역된 분량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앞으로 번역이 계획된 고전자료는 대략 국고문헌이 2,500여책, 일반고전이 4,000여책 등으로 번역이 현재 속도로 진행될 경우 100년 이상이 소요될 것이라 한다.

 번역해야 할 대상은 많은데 정작 작업을 수행할 전문 인력은 턱없이 부족한 상태다. 후속 인력은 더 이상 공급되지 않는데 한문해독 능력을 갖춘 한학원로들은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한문고전 관련 학과에서 적지 않은 졸업생이 배출되고 있지만 전문적으로 번역의 길을 희망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나마 고전번역원 산하의 고전번역교육원이 부족한 제도권 한학 교육의 틈을 채워주고 있지만 여전히 고전을 번역할 수 있는 역자는 좀처럼 길러지지 않는다는 게 학계의 인식이다. 실제로 1998년부터 2007년까지 한국고전번역원에 새로 참여한 역자들은 대개 한해 5명이 채 안 되는 등 현상유지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상하 교수(고전번역교육원)는 “한문에 대한 인식 부족, 역자에 대한 열악한 처우 등의 이유로 한문 공부에 인재들이 많이 모이지 않는다”며 걱정했다. 고전번역연구원 정출헌 사업본부장 역시 “이러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향후 산적한 한문고전은 번역되지 않은 채 밀려나 끝내 사장돼버리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지나치게 역사문헌과 문집에 편중돼 있는 번역 분야도 문제로 지적됐다. 우리나라 한문전적들은 경(經)부, 사(史)부, 자(子)부, 집(集)부의 네 부분으로 나뉘는데 현재 번역된 총 4,174권 중 2,150권이 사부(역사문헌), 1,560권이 집부(문집)에 해당한다. 그러나 경부(경전)와 자부는 결코 소홀히 대할 영역이 아니다. 특히 전체 한문전적의 26.5%를 차지하는 자부에는 경학, 법제, 의궤, 필기, 잡록, 문화사, 예술사, 생활사와 관련한 한문고전들이 포함되는데, 최근 문화사, 생활사, 미시사의 중요성이 인정받고 있는 학계의 경향을 감안한다면 번역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학자들의 의견이다. 이상하 교수(한국고전번역원)는 “서종이 다양하고 분량이 매우 방대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자부 번역이 제대로 되지 못한 상태”며 “번역된 자부들은 대체로 특정 분야 전공자의 단독 번역 혹은 역자의 단독 번역으로 이뤄져 번역의 오류, 전문성의 결여 등의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고 밝혔다.

 
한문을 한글로 번역한다는 것

번역의 대상이 되는 문헌이 편중돼 있다는 것과 더불어 번역서의 낮은 가독성도 문제로 제기된다. 가령 2007년 민족문화추진회가 『승정원일기』와 『일성록』을 비롯해 『사가집』, 『포저집』, 『약천집』 등 3종의 문집을 선정해 학계 전공자에게 번역본 검토를 의뢰한 결과 번역의 정확성과 충실도는 긍정적이었으나 가독성에서는 일괄적으로 문제가 제기됐다. 지나치게 번역투의 문장을 사용하거나, 원문에 충실하려고 한 나머지 풀이나 설명 없이 원문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해 학부 전공 학생이나 대학원 연구원마저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한문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의 역사적, 학술적 특수성이 충분히 고려되고 있지 않아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다고 진단한다. 한문을 한글화하는 작업은 여타 외국어처럼 단순히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치환하는 행위를 넘어선다. 최소한 한글이 공식적인 공용어로 채택됐던 갑오경장(1895) 전까지 한문은 오랫동안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고 의사를 소통했던 문법체계였다. 즉 현재 우리는 고전어 한문과 공용어 한글이라는 두 가지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전번역 작업이 주안점을 둬야 할 것은 단순히 한문을 얼마나 정확하게 한글로 ‘옮기느냐’가 아니라 한문고전으로 구성된 의미체계와 한글로 이뤄진 의미체계 사이에 가교를 놓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번역작업들은 한문을 우리 문화를 구성하는 하나의 고전어로 보지 않고 다만 번역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 ‘한문 문법을 제대로 표현했느냐’, ‘한문 어휘를 제대로 독해했느냐’와 같은 구문론적 요소들이 번역자들의 주 관심사가 돼 왔다. 송재서 명예교수(성균관대)는 “가독성을 증대시킬 수 있는 바람직한 고전번역은 문자 추종적인 충실성이 아니라 의미의 충실성을 목표로 할 때 이뤄진다”며 “원문의 의미를 정확히 살리는 동시에 원문으로부터의 간섭을 덜 받으며 비교적 자유롭게 번역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가령 문학작품을 번역할 때 내용전달에만 매달리기 보다는 원문이 지니고 있는 문체, 수사법, 어조 등이 고려돼야 한문의 고전적 의미체계가 제대로 구현될 뿐만 아니라 번역서의 가독성도 증대되는 것이다.

 
고전번역,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선

이에 그동안 번역작업 자체에 대한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고찰이 부족하지 않았냐는 반성의 움직임이 번역자들 사이에서 일고 있다. 고전번역을 통역과 같은 단순한 ‘옮김’으로 인식하고 학술행위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선 번역 작업의 전단계인 고전적(古典籍)을 정리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고전적을 정리한다는 것은 고문헌 원문들을 이용에 적합하도록 교정·교감· 표점·주석 등 현대적 방식을 사용해 일차로 가공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한문의 맥락적 의미와 어조 등을 고려해 번역하기 위해서는 정리작업이 필수적인데 그동안 지배적이었던 단순 독해·번역 중심의 작업은 이를 소홀히 해왔다는 것이다. 고전번역원 서정문 연구위원은 “지금까지는 한문고전을 정리하는 교감, 표점 등의 과정은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번역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조건단계로 이해했다”며 “한문고전번역사업의 최종결과물을 한글화된 고전의 총합으로서만이 아니라 ‘잘 정리된 한문고전의 총체’와 이를 바탕으로 ‘잘 번역된 한글 고전의 총체’가 결합된 구조로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문의 의미 전달에 충실한 번역이 되기 위해서는 그 전에 ‘잘 정리된’ 고전정리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번역 인력을 양성하는 교육현장에서도 번역학, 문헌학 등 교과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나섰다. 실무에서는 한문을 독해하는 능력뿐 아니라 문헌의 학술사적 위상, 교감·표점·공구서의 활용 방법 등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인데 아직까지 고전번역교육원 등에도 강독 위주의 수업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남아있는 문헌들이 더 많지만 고전번역원이 출범한 이래로 국내 고전번역 사업은 확실히 양적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고전번역 사업이 수요자들을 만족시킬 만큼 학술적으로나 대중적으로나 질적 성장을 이뤘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서정문 연구위원은 “이제는 가시적인 양적 성장이나 개별적인 단발성 성과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보다 큰 틀에서 접근할 때”라며 “양질의 번역은 우리 사회가 한문고전을 어떤 문화양식으로 받아들일 것이냐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따를 때 비로소 가능해질 수 있다”고 제언했다.

 
*교감(校勘): 고적을 대상으로 문자 상의 잘못, 탈루를 찾아내고 보정하는 작업.
*표점(標點): 문장의 문법적, 논리적 구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문장부호, 혹은 그러한 부호를 가하는 작업.
*공구서(工具書): 색인, 해제와 같이 고전문헌에 수록된 다양한 정보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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