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서평] 정현규 교수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ㅣ오순희 옮김ㅣ서울대학교출판부ㅣ404쪽ㅣ1만5천원

두명의 여자와 두명의 남자가 있다. 한 남자는 작가를 꿈꾸는 부고담당 기자이고, 한 여자는 전직 스트리퍼이다.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두 사람은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남자는 스트리퍼로 일했던 여자와의 관계를 에로틱한 소설로 써서 출판하려고 한다. 책에 들어갈 사진을 찍기 위해 스튜디오에 간 남자는 남편과 별거 중인 여류사진작가를 만나고, 이 첫 만남에서 또다시 사랑에 사로잡히고 만다. 하지만 그와 같이 살고 있는 여자의 존재를 알게 된 이 여자는 매몰차게 그를 거절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다. 의사와 결혼한 사진작가는 오랫동안 거부해온 기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 사실을 남편에게 고백한다.

다른 두명의 여자와 두명의 남자가 있다. 젊은 시절 서로 좋아하던 한 여자와 한 남자는, 부모의 뜻에 따라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 시간이 흘러 배우자와 사별한 두 사람은 다시 첫사랑을 만나 가정을 이룬다. 부족할 것 없는 이 부부는, 곤란을 겪고 있는 남자의 친구와 여자의 양녀를 집으로 불러들이게 된다. 부부는 이 둘이 서로 맺어지길 바랐지만, 기대와 달리 남편은 양녀와, 아내는 남편의 친구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앞의 작품은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2004년작 「클로저」이고, 뒤의 작품은 괴테의 1809년작 ?친화력?이다. 21세기의 사각관계만큼이나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200년 전의 사랑 모습을 독자는 ?친화력?에서 발견하게 된다. 따지고 보면 사랑만큼 보편적인 주제도 없고,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그것처럼 우리를 몰두하게 하는 것도 없다. 괴테에게 있어 평생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되었던 것 역시 사랑이다. 어떻게 다른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에게 천재칭호를 수여했던 ?젊은 베르터의 고통?이 그렇고, 필생의 대작 ?파우스트? 역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친화력? 역시 이 범주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사랑은 모두 비극으로 끝난다. 다른 남자의 아내를 사랑하게 된 베르터가 그렇고, 순진한 처녀와의 불장난과도 같은 파우스트의 사랑이 그러하며, 결혼의 굴레에 갇힌 채 또다시 운명적인 사랑의 대상을 만나는 에두아르트의 사랑이 그러하다. 요는 엇나가버린 만남의 비극이 이들의 운명인 셈이다.

삽화: 김태욱 기자 ktw@snu.kr


괴테의 문학작품은 국내에 가장 많이 번역된 독일 작품 중 하나이긴 하지만, 아직도 변변한 전집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 학계의 현실이다. 개별 연구자들의 관심과 역량에 의지해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나오고 있는 괴테 번역 가운데, 이번에 번역된 괴테의 ?친화력?은 괴테 자신이 자신의 가장 훌륭한 소설이라고 칭한 바 있는 작품이다. 20세기의 유명한 소설가 토마스 만이 “독일인들의 최고의 소설”이라고 한 것도 아마 괴테 자신의 언급에 영향을 받은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소설로 하여금 이러한 최고의 찬사를 누리게 했던 것일까? 무엇보다 인간사의 영원한 주제인 ‘사랑’, 그것도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운명적인 사랑이 이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데에 그 이유가 있겠지만, 이 사랑이 ‘삶의 원현상(原現像)’으로 기능한다는 데에 더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괴테가 다양한 모든 자연만물의 배후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원현상’은, 인간의 삶 속에서는 ‘사랑’으로 집약된다. 사랑은 그만큼 인간관계에 있어 근원적이며 결정적인 요소인 셈이다.

최근의 과학적 연구에서는 남녀 간의 사랑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번식의 욕구에 따라 이뤄지는 남녀 간의 사랑에서는 두뇌와 오감이 고도의 협력 작용을 해 짝을 찾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중에서도 첫 판단을 좌우하는 것은 바로 냄새이다. 좀 원시적인 접근인 듯 보이지만, 아직 우리 인간에게 동물적인 흔적이 남아있다는 징표이다. 사랑의 화학작용 내지는 진화심리학의 결론인 셈이다. 이런 과학적 분석이 없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냄새가 가진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17세기 고상한 영국신사들은, 겨드랑이에 오랫동안 끼워놓아 은밀한 냄새가 깊이 밴 천 조각을 숙녀들의 코에 대고 흔들어 댔다고 한다. 물론 이런 수법은 여성들에게도 낯설지 않았다. 이들은 같은 곳에 ‘사랑의 사과’라는 것을 품고 다니다가 체취가 배어들면 사랑에 목마른 구애자에게 전해주었다고 한다.

물론 괴테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이런 류의 원시적 짝 찾기는 아니었다. 괴테가 ?친화력?에서 끌어들이고 있는 당대의 과학이론은 하나는 마그네티즘이고 다른 하나는 화학이다. 마그네티즘은 말 그대로 만물에 존재하는 자력이 어떤 대상은 끌어들이고 어떤 대상은 밀어낸다고 보는 세계관이다. 친화력, 더 정확하게는 ‘선택적 친화력’이라는 개념으로 인간관계를 설명하려는 과학적 방법은 당시의 화학적 세계관에 기반을 두고 있다. 어떤 방법을 취하든 공통적인 것은 남녀 간의 사랑을 당대의 과학적 세계관과 연계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자연계와 인간계는 이렇게 하나의 통합적 원리로 설명된다. 이런 식으로 남녀 간의 사랑을 읽어냈다는 것이 괴테의 현대성을 담보한다고 얘기하는 것은 지나친 합리화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소설의 실험소설적 측면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귀족의 장원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한 쌍의 부부를 집어넣어 놓고, 다시 여기에 한명의 남자와 한명의 여자를 더해 이들 간의 관계변화를 보는 것은 말 그대로 인간관계실험인 셈이다.

그러나 필연적인 듯 보이는 과학적 개체선택의 경우에도 조작된 호르몬 분비가 남녀의 판단을 잘못된 곳으로 이끄는 것처럼, ?친화력?의 남자주인공 에두아르트 역시 잘못된 판단을 통해 치명적 결말로 치닫는다. 그는 거듭되는 우연을 필연으로 해석하는 오류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사랑을 과학성을 근거로 합리화하고자 하지만 이러한 그의 결론은 지나치게 자의적이다. 이러한 자의성은 사실 괴테가 낭만주의자들을 지칭할 때 자주 쓰는 말이다. 따라서 이 소설을 낭만주의 비판으로 읽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필연을 가장한 오독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욕망 때문이다. 이러한 양상이 가장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은 에두아르트와 그의 아내 샤를로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인 오토Otto이다. 아이가 잉태된 잠자리에서 에두아르트는 오틸리에를 상상하고, 샤를로테는 대위를 떠올린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오틸리에와 대위의 모습을 닮는다. 결국 오토(Otto)는 네명의 등장인물의 욕망이 겹치는 지점인 셈이다. 게다가 에두아르트의 어릴 적 이름은 오토였고, 대위의 이름 역시 그랬다. 오틸리에(Ottilie)의 이름에도 그 흔적은 각인되어 있고, 샤를로테(Charlotte)의 이름 역시 같은 맥락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최종적인 비극은 이 아이가 물에 빠져 죽음으로써 절정에 도달한다. 그런데 이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에두아르트의 반응이 압권이다. 그는 이 사건을 신의 섭리로 생각하고, 오틸리에와 결혼하려는 자신의 계획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이 제거된 것으로 해석해버리는 것이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라고 해서 200년 전의 주인공과 그리 썩 다르지는 않다. 과학적이고 지극히 계산적인 지표들도 우리는 자주 자의적으로 읽고 해석한다. 특히 우리의 욕망이 개입된 곳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대단히 조심해야 한다. 산술적 지표와 과학적 근거들을 들이대면서 누군가 우리들을 설득하고자 할 때에는 더더욱 말이다.

숙명여대 독일언어·문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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