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울타리 밖에서 꽃 피는 학습 공동체
대학 울타리 밖에서 꽃 피는 학습 공동체
  • 허서연 기자
  • 승인 2012.04.15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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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 분야에서 신자유주의는 교수와 연구자들에게 연구업적에 대한 과도한 부담을 초래하고 학생들에게는 스펙 경쟁을 유도해 ‘취업’에만 관심을 두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듯 상아탑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해가는 대학에서 기초학문 관련 강의들이 폐강되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실제 경남대와 원광대에서는 취업률과 재정 기여도가 낮게 평가된 철학과를 비롯한 인문 계열의 학과들이 폐지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인문학의 위기 속에서도 인문학을 자신들의 삶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움직임은 대학 밖에서 지속되고 있다. 자발적으로 학습 공동체를 만들어 학습 모임과 연구를 이어가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2000년 ‘철학아카데미’의 설립을 시작으로 인문학 연구 단체의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수유+너머’와 ‘문예아카데미’ 등 독립적인 인문학 연구 공간들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또 ‘백북스’와 같이 자발적으로 모여 책을 읽는 독서모임을 비롯해 지방자치단체(지자체)에서 시민들과 저소득층, 노숙인들을 대상으로 개설한 ‘풀뿌리 인문학’강좌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대학신문』은 이렇듯 인문학 위기 속에서도 자발적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학외 공동체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생활과 일치한 인문학 세계

◇‘수유+너머’=연구 공간 ‘수유+너머(수유너머)’는 연구와 생활을 병행하는 학습 공동체로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편이다. 수유너머는 매학기 고전읽기를 비롯해 사회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강좌와 세미나를 개설하고 있다. 기업과 정부의 후원을 거절하고 있는 수유너머는 이러한 강좌로 얻은 수입과 회비로 운영된다.

수유너머만의 독특한 점은 바로 ‘네트워크’다. 수유너머의 연구소들은 연구 공간과 생활 공간의 합치를 지향한다. 일상생활을 공유하며 같이 생활하기 때문에 연구 활동 외에도 그들만의 네트워크 즉, 소통의 공간이 생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연구소에 들어가 가장 처음 거쳐야 할 단계는 인문학 학습이 아닌 밥 짓기와 청소다.

(사진 제공: 수유너머)

1999년에 설립돼 10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수유너머는 그 규모가 확대되면서 현재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자리한 ‘수유너머N’, 성북구 삼선동에 있는 ‘수유너머R’,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수유너머문’으로 확대·분산된 상태다. 이 중에서도 ‘수유너머R’은 강좌와 세미나 활동뿐 아니라 책과 잡지의 성격을 합쳐놓은 매체인 『부커진 R(아르)』라는 학술지도 발간하고 있다.

수유너머 연구자들은 스터디를 통해 지속적으로 단행본과 같은 성과물을 내놓는다. 일례로 도서출판 그린비와 세미나 팀을 만들어 ‘다시 쓰는 고전(리라이팅 클래식)’을 기획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수유너머N에서는 지난 3월 ‘인문사회과학 연구원과정’을 열었다. 인문사회과학 연구원과정은 정치·사회·문화·예술 관련 총 2년 과정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이다. 공식적인 대학원 학위가 인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2년의 밀도있는 인문사회과학 강좌를 통해 이 분야의 준전문가를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다. 본격적으로 과정에 들어가기 앞서 이 프로그램을 설명하는 공개특강은 10일 만에 신청인원이 정원 80명을 다 채우며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인문학 특화 강좌 중심의 학술 공동체


◇‘대안연구공동체’=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자리한 대안연구공동체는 자본과 권력에 종속되지 않고 서로의 생각을 소통하며 살아있는 지적 공동체를 추구하고자 철학·문학·어학 등 다양한 분야의 인문학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철학자 이정우 박사와 불문학자 이상빈 박사, 그리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성일권 박사, 언론인 출신 김종락이 모여 만든 대안연구공동체는 그 안에서 ‘파이데이아’와 ‘에콜 에라스무스’로 나뉜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교양 또는 교육을 뜻했던 ‘파이데이아(Paideia)’의 의미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파이데이아에는 철학과 사상을 중심으로 한 인문학 강좌가 주로 개설되고 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철학 입문강좌부터 중급강좌까지 난이도별로 강좌가 열리고 있으며 ‘생명과학과 인지과학’, ‘현대철학과 현대미술’ 등 다양한 분야의 강좌들도 개설되고 있다. 앞으로는 대학원생들과 연구원들이 참여한 세미나도 진행될 예정이다.

(사진 제공: 대안연구공동체)

‘에콜 에라스무스(Ecole Erasmus)’에는 프랑스어·이탈리아어·라틴어 등 유럽의 다양한 언어와 문화 강좌가 주를 이루고 있다. 강좌에서는 단순히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어학 능력 위주의 강의가 아니라 해당 언어권 문화와 역사까지 총망라하는 것이 특징이다. 국내에서 영어와 중국어의 위세에 눌려 접하기 힘들었던 터키어·라틴어 등의 소수언어를 배울 수 있으며 앞으로 스웨덴·세르비아·헝가리어 등에 대한 강좌도 신설될 예정이다.
이외에도 연구자들은 최근 강좌를 통해 인문학의 범주를 넓히는 노력을 하고 있다. 목공, 그림, 건축, 사진 등을 인문학의 범주에 포함시켜 작품을 이해하고 비평하는 ‘표현 인문학’ 강좌가 눈에 띈다.

하지만 대안연구공동체는 신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강좌 호응도가 낮은 편이다. 지난해 40여개의 철학 사상 및 세계 다언어 강좌를 내걸었지만 봄 학기의 수강자는 모두 합해 50여명 밖에 되지 않았고 애써 만든 강좌 대부분이 폐강됐다. 김종락 대표는 “건물 임대료와 운영비 등에서 적자가 이어지면서 대부분의 강사진들은 기부 차원에서 무료로 강좌를 진행하기도 한다”며 “도올 김용옥 선생이나 박성준 선생, 불교시민강원의 여러 스님 등 여러 선생님들은 무료강좌를 자청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자발적 책 읽기 모임


◇서점도 인문학 배움터=최근 10여년 사이 대부분의 인문사회과학서점들이 줄줄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그 전만 해도 서점은 단순한 서점이 아닌 서평 모임, 각종 토론회 등이 열리는 소통의 공간이었다. 현재 대부분 인문사회과학서점들의 자취는 거의 사라졌지만 여전히 성균관대 앞 ‘풀무질’과 ‘그날이 오면’은 그 명맥을 지키며 다양한 학술활동들을 진행하고 있다.

우선 ‘그날이 오면’은 1988년부터 20여년이 넘도록 서울대 녹두거리를 지키고 있는 서점이다. 90년대 초 ‘그날이 오면’의 김동운 대표는 1998년부터 2년간 ‘그날에서 책읽기’라는 서평 전문지를 창간해 무료로 배포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학회, 저자와의 대화, 독서모임 등 여러 행사도 진행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그날 강연회’와 정규적으로 열리는 서평대회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앞에 자리한 ‘풀무질’은 1985년 문을 열어 지금까지 인문사회과학서점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풀무질 대표 은종복씨는 작은 서점의 공간적 제약을 장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작은 공간을 이용해 자주 오는 사람들과 같이 책을 읽는 책모임을 만든 것이다. 이 책모임은 한달에 한번 만나 책을 읽고 서점에 있는 공부방에서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인문고전 읽기모임, ‘백북스’= 강좌형태는 아니지만 자발적 독서모임도 있다. ‘인문고전 읽기 모임’인 백북스는 2002년 현영석 교수(한남대 경영정보학과)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재학 기간 동안 책 100권을 읽자’는 취지로 시작했다. 이후 일반인 대상의 독서모임으로 확대돼 대전 지역에서만 열리던 모임이 다른 지역으로 확대됐다. 2007년 서울을 시작으로 인천, 대구, 경주, 포항 등 전국의 대부분 지역에서 학생들뿐 아니라 회사원과 전문직 종사자 등 다양한 직업과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 책 선정은 구성원의 합의에 따라 이뤄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고전이 선호되는 추세다.

백북스에서는 인문고전 읽기모임 외에도 생물학 소모임, 현대과학과 철학 등의 소모임도 운영되고 있다. 매달 두 차례 각계의 전문가와 저자들이 참석해 강연을 열고 있으며 지난 12일에는 유성구에서 제235차 정기 강연회가 있었다. 백북스의 온라인 회원은 이미 6천명을 넘어섰으며 오프라인 모임도 수백명씩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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