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의 생명과 직결되는 의료사고. 그러나 의료 정보의 전문성과 비대칭성이라는 특수한 성격 때문에 환자가 소송을 걸어도 병원측의 과실을 입증하기는 쉽지 않다. 그간 분쟁 조정 제도는 유명무실한 상황이었고 의료계의 ‘침묵의 카르텔’에 대한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돼왔다.

지난 8일(일) 23년간 표류하던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조정 등에 관한 법률(의료분쟁조정법)이 드디어 시행에 들어가면서 의료사고 피해자들에 대한 구제의 길이 열렸다. 그러나 법 조항을 둘러싼 의료계와 환자측의 갈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에 『대학신문』은 현재 의료분쟁 해결 방법을 두고 벌어지는 공방을 짚어보고 향후 의료분쟁의 해결 가능성을 모색해봤다. 

 글: 권민 기자 realmrals276@snu.kr  삽화: 선우훈 기자 mrdrug@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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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나는 의료사고, 증가하는 의료소송

삽화: 선우훈 기자 mrdrug@snu.kr
지난 2006년 건양대병원에서는 차트가 뒤바뀌어 위암 환자의 갑상선과 갑상선질환 환자의 위를 수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2008년에는 30대 주부가 서울 압구정동의 한 성형외과에서 턱 깎는 수술을 받은 뒤 왼쪽 턱에 수술용 드릴 조각이 부러진 채 박힌 것을 발견한 사고도 있었다. 이밖에도 감염, 약물 오·남용, 오진 등 진료과정 곳곳에서 발생하는 의료사고는 환자의 건강뿐 아니라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매우 심각한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의료사고를 관리하는 기구가 없어 정확한 수치 파악은 어렵지만 지난 2010년 국정감사 결과 2007년부터 3년 동안 전국의 국립대병원에서만 141건의 의료사고가 발생했다. 한국소비자원에 접수되는 의료서비스 관련 불만 접수도 2011년 833건으로 2010년의 766건에 비해 9.5%나 증가했다.

의료소송 건수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법원에 접수된 의료소송은 1989년 69건이던 것이 2010년에는 871건까지 증가하는 등 해마다 증가 추세다. 미제건수도 누적돼 소송의 장기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작년 11월 보건복지부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의료소송은 1심 재판에만 평균 26.3개월이 걸려 일반소송의 4배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이렇듯 의료사고 피해자와 의료인 모두 시간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의료소송이 증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의료사고 발생시 분쟁을 조정하기 위한 제도나 기구가 제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기존에 존재하는 제도가 의료 분쟁을 적절히 해결하지 못해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의료법에 따라 중앙·지방의료심사조정위원회를 두고 분쟁을 조정하거나 한국소비자원 산하 소비자분쟁조정위원회에서 의료분쟁을 다뤄왔다. 또 민사조정법에 의해 법원의 조정으로 의료분쟁을 해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의료심사조정위원회는 조정 횟수가 거의 전무하고 소비자분쟁조정위원회에서 다루는 조정 업무는 100만원 이하의 소액 피해 사건이 42.2%로 대다수를 차지한다. 법원에 조정을 신청한 건수 역시 2009년 128건에 불과하다.

 


넘을 수 없는 ‘의료지식’의 벽

이처럼 늘어나는 의료소송에서 환자가 승소하는 경우는 일반소송에 비해 드물다. 2004년 일반민사소송은 62.2%의 인용률(원고승, 원고일부승, 화해, 조정 포함)을 보인 반면 의료소송의 인용률은 53.1%로  낮았다.

이렇듯 의료 분쟁 재판에서 환자가 이기기 어려운 것은 의료인의 과실을 찾아 입증해야 하는 책임이 환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소송을 제기한 환자는 △의료인에게 일반인의 상식에 바탕을 둔 의료상의 과실이 있었다는 점 △환자가 병원에 가기 전에는 의료행위 이후에 발생한 나쁜 증세가 몸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 △수술이나 약 부작용에 영향을 끼칠 다른 원인이 없었다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의학지식 자체가 전문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의료인에 비해 의학지식이 부족한 일반인 환자는 의료과실을 입증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의료인의 재량이 상당 부분 인정되고, 의료행위가 수술실 등 비공개적인 공간에서 이뤄져 일반인이 정보에 접근하기 어려우며, 의료행위 자체가 처음부터 일정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들은 환자의 승소가능성을 더욱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최근 법원에서는 이러한 환자의 불리한 지위를 인정해 환자의 입증책임을 완화하고 있지만 환자측에서는 여전히 의사의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문제를 계속제기하고 있다. 의료소비자시민연대 강태언 사무총장은 “의료분야의 모든 정보에 있어 편중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의학지식이 전무한 환자가 의료인의 과실여부를 증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삽화: 선우훈 기자 mrdrug@snu.kr

실제로 의료사고의 유일한 증거인 진료기록마저도 의료계에 의해 작성되고 보관되는 구조적 특성 때문에 환자들은 진료기록의 진실성에 대해 불신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최근 모든 기록의 수정 여부가 드러나는 전자차트제도가 도입돼 위·변조가 어려워졌음에도 의료분쟁마다 진료기록에 대한 의혹 제기가 계속되는 이유는 결국 정보의 비대칭성 때문으로 풀이된다.

재판부 역시 의학지식이 부족해 의료관련 자료의 감정을 의료계에 맡길 수밖에 없어 의료계의 잘잘못을 의료계가 감정한다는 데서 오는 환자측의 불신 역시 크다. 특히 대한의사협회(의협)에 감정을 보내 진료 과정의 문제를 조사하는 경우 의협이 의사의 잘못을 잘 알리려 하지 않는 등 의료계 전반에 ‘침묵의 카르텔’이 존재한다는 생각 때문에 환자들이 감정 결과에 불복하고 이는 잦은 항소로 이어진다. 조형원 교수(상지대 의료경영학과)는 “분쟁조정에 동원되는 의사측의 조정위원에 대해 환자측이 일반적으로 충분히 신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그동안의 조정 혹은 중재의 비사법적 해결방식은 감정 과정에서 공정성이 담보되지 못해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따라서 환자나 시민단체측은 정보나 전문성 면에서 불리한 환자가 인과관계를 입증하기 쉽지 않다는 의료사고의 특수성을 감안해 사고의 입증책임을 완전히 전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의료사고가 발생하면 원칙적으로 의료인에게 과실이 있다고 추정한 뒤 의료인이 자신에게 과실이 없다는 점을 증명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전문가들은 입증 책임 전환이 법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말한다. 손해배상소송 등 민사소송에서는 원고가 피고인의 잘못을 직접 입증하게 돼 있는 것이 원칙인데 의료기관으로 입증 책임을 전환하는 것은 이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윤진수 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일반적으로 원고가 피고의 잘못을 밝혀야 하는 것이 법의 원칙이기 때문에 의료사고에 대해서만 예외를 인정하기는 곤란하다”며 “지금도 판결에서 일반인의 상식 수준 선에서 의사에게 잘못이 있음을 보일 경우 이를 인정하는 등 충분히 입증 책임의 어려움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의료계에서는 입증 책임을 전환할 경우 의사가 의료행위 과정에서 발생할 사고를 우려해 책임질 수 있는 안전한 범위에서만 진료하고 다른 의료기관에 환자를 넘기는 등 방어적으로 진료하거나 조그만 질병에도 검사를 지나치게 하는 과잉진료의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에 환자진료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의료사고에 대해 형사 소송을 면해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반면 시민단체들은 입증책임을 전환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와 같은 조항을 도입하는 것은 의사특혜일 뿐이고 의료소비자인 환자들에게 그 부담을 떠넘기는 것이라 비판한다.

이렇듯 세부적 조항에 대한 이해관계가 얽혀 실질적으로 의료인과 환자 간 조정을 돕기 위한 시도들은 계속해서 무산됐고 분쟁 조정 관련 법안 역시 표류해왔다.

 


의료분쟁조정법, 대안이 될 것인가

◇23년만의 타협의 결과, 의료분쟁조정법=
보다 합리적인 의료사고 분쟁 해결 방법이 절실해짐에 따라 의료사고처리 법안이 국회에 건의된 지 23년만인 지난해 4월 의료분쟁조정법이 제정됐다. 지난 8일부터 시행된 이 법은 크게 △의료분쟁조정중재원과 의료사고감정단 설치 △분만 과정에서의 불가항력적 의료사고에 대한 무과실 보상 △업무상 과실치상죄에 대한 반의사불벌(형사처벌 특례) △손해배상금 대불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의료분쟁조정법에서 가장 핵심적인 조항은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중재원)의 설치다. 독립성, 전문성을 가진 조직이 중립적으로 의료분쟁을 해결한다는 것이 법의 골자다. 이를 위해 판단과 조정 기능을 하는 의료분쟁조정위원회(조정위)와 감정 기능을 하는 의료사고감정단(감정단)을 분리해 감정단에서 환자나 의료인의 주장에 의지하지 않고 의료사고를 직접 조사한 후 조정위에서 이를 토대로 조정안을 마련토록 했다. 중립성과 공정성을 위해 조정위는 법조인 2인, 의료인 1인, 소비자단체 1인, 대학교수 1인으로 골고루 구성되며 환자의 입증 책임 부담을 대신 지는 감정단의 경우 의사 2인, 법조인 2인, 소비자단체 1인으로 이뤄진다.

분만 과정에서 불가항력적인 의료사고가 발생했을 때는 의사에게 과실이 없더라도 보상을 하도록 하는 조항 역시 삽입됐다. 출산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산부인과의 특성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환자가 피해를 입었을 경우 국가와 보건의료기관 개설자가 보상액을 각각 7:3으로 부담한다.
또 조정이 성립돼 피해자가 의사의 처벌을 원치 않을 경우 처벌을 하지 않는 조항도 신설됐다. 이 조항은 당사자 간 민사 합의 가능성을 높이고 의료인이 조정절차를 이용할 유인을 제공한다. 형사 처벌을 두려워한 의료인의 방어진료를 막고 안정적 진료환경을 조성하는 효과도 있다. 다만 국민의 법 감정을 고려해 중과실, 중상해는 특례에서 제외했다.

한편 조정 결과 의료기관이 피해자에게 손해를 배상하라는 판정이 내려졌음에도 배상금이 지급되지 않을 때에는 앞으로 중재원이 대신 지불하고 이후 보건의료기관 개설자가 대불 과정에서 든 비용을 부담하게 된다.

의료분쟁조정법은 의료계와 환자측이 한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갈등을 접어두고 처음으로 합의점을 도출해낸 결과물이라는 데서 그 의미를 지닌다. 법무법인 해울의 신현호 변호사는 “의료분쟁조정법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이 우리나라에서 특별히 제정된 법”이라며 “중재원을 비롯한 제도가 공정하게 운영된다면 의료소송이 대폭 감소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또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안기종 대표도 “의료분쟁조정기구라는 객관적 제도가 마련됐으니 의료사고 소송으로 인한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계속되는 환자-의료계 갈등…해결방안은?=그러나 이 조항들은 시행 전부터 각각 환자측과 의료계의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먼저 시민단체에서는 손해배상금 대불제도가 결국 국가가 아닌 개인이 책임지는 시스템이므로 의사측이 합의 과정에서 보상액 지급을 최소화하려 해 피해에 상응하는 만큼의 보상이 이뤄지기는 어렵다고 우려한다. 피해 구제에 관한 국가 차원에서의 제도가 마련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분쟁을 해결하려고만 하면 결국 중재원 역시 소액 사건에 대해 중재하는 기존 기구와 다를 바 없어진다는 것이다.

또 현 의료분쟁조정법은 환자측이 지속적으로 주장해오던 입증 책임의 전환 규정이 명시적으로 들어있지 않아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있다. 안기종 대표는 “중재원이 입증 책임을 대신 진다고는 하지만 중재위원회 안에서도 의사가 과실 여부를 판단하는데 의료계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판단할 것이 자명하다”며 “나아가 민·형사소송의 경우 여전히 입증 책임이 환자에게 있어 중재 과정이나 소송 모두 환자가 불리한 것은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의료계도 반발이 거센 것은 마찬가지다. 새 법이 중재과정에서 의사들에게 권리는 없이 의무만 지우고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환자는 중재를 신청해도 중도 포기하고 소송으로 넘어갈 수 있지만 의사는 중재에 응하면 출석 요구에 무조건 따라야 하고 중도 포기가 불가능하다. 무과실 분만사고에 대해 의료인으로 하여금 30%의 보상금을 부담하도록 한 제도 역시 책임이 없는 이에게 부당한 책임을 지우는 등 기본적인 법 원리에 위배된 조항이라는 비판이 계속되고 있다. 의협 37대 출범준비위원회 이용진 위원은 “법 자체가 의료계와 충분한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제정된 것”이라며 “양쪽의 권리와 의무가 대등하고 중재인이 공정하며 무과실인 경우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당연히 협조하겠지만 지금의 법은 전혀 그런 점을 보장하지 않고 있다”고 못박았다. 현재 산부인과학회는 산부인과의사의 보상금 분담 문제 등이 합리적으로 개정되지 않으면 중재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의사를 내비치고 있는 실정이다. 의료분쟁조정법상으로는 의사가 중재에 응해야 감정이 이뤄진다.

특히 중재원의 구성이 의사측에 불리하게 이뤄진다는 점에서 의료계의 반발이 두드러진다. 의협은 이 제도가 의사들의 참여를 충분히 보장하지 못했다며 감정단의 구성원이 전문성과 공정성을 담보하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대한의원협회 윤용선 회장은 “정족수의 5분의 1을 보건의료인으로 채우지만 이 의료인에는 의사, 간호사, 치과의사, 한의사가 모두 해당할 수 있다”며 “정작 의료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분야에 종사하는 의사는 감정단에 참여를 못할 수도 있어 감정에 전문성을 확보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법안이 각계의 우려와 비판을 잠재우고 안정적으로 정착해 의료사고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긴 진통 끝에 제정된 제도가 차질없이 시행돼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신현호 변호사는 “의료사고 관련 갈등이 지지부진한 탁상공론에서 벗어나 의료분쟁 해결과정이 진일보하는 계기가 되도록 구성원을 공정하게 선발하는 등 제도가 원만히 운영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형원 교수 역시 “단지 관련 제도의 시행만으로 의료분쟁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된다고 봐서는 안된다”며 “이전 분쟁조정기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현행 비사법적 해결제도가 왜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는지 고민한 뒤 의료인과 환자의 신뢰관계가 형성될 수 있도록 여러 인력의 종합적 연계를 통한 시스템적 대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안기종 대표는 “환자측이나 의료계 모두 서로가 100% 만족하는 이상적인 대안을 지금 당장 얻을 수는 없다”며 “미흡한 부분이 있더라도 각계의 참여와 합의를 통해 점차 개선해 나가는 등 의료분쟁조정법이 차질없이 시행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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