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지금부터 약 2년 전인 2010년 5월,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 교수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가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은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출간 11개월 만에 100만부라는 경이적인 판매 부수를 기록하였다. 저자인 샌델 교수 자신도 놀란 이러한 현상에 대해 다양한 분석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하나는 현 정부 들어 사회 정의가 심각하게 후퇴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를 우려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정의라는 화두가 큰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분석에 동의할 수 없다. 만약 사회 정의의 후퇴를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 그 동기였다면, 독자들이 『정의란 무엇인가』처럼 정의 개념의 본성을 고찰하는 책을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개념 ‘X’에 대해 “X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그 개념의 본성이 더이상 우리에게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 정부 들어와서 사회 정의가 심각하게 후퇴한 것과는 별도로, 『정의란 무엇인가』와 같은 책이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정의라는 개념의 본성이 더 이상 분명치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한·미 FTA에 반대하는 것은 정의로운가? 무상 의료는 정의로운가? 대학 서열을 해체하는 것은 정의로운가?

비단 ‘정의’뿐 아니라 샌델의 책 이후 ‘국가’나 ‘민주주의’ 등 우리가 비교적 자명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개념들의 본성에 대한 책들이 꾸준히 출간되었다. 이러한 책들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은 우리 사회가 근본적인 변환의 시기를 겪고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우리 사회는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 나가야 할 새로운 시대정신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직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흔히 해방 이후 한국 사회를 이끌어온 두 시대정신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론한다. 한국 사회는 유례없이 짧은 기간 동안 산업화와 민주화 모두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한편으로 이러한 성취에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고 다른 한편으로 이를 위해 희생을 치른 이들에게 커다란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 그러나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취 이후 우리가 이제 새롭게 지향해야 할 시대정신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현 정부는 출범 당시 ‘실용주의’를 제창하였다. 그러나 실용주의가 새로운 시대정신이 될 수는 없다. 현재 많은 이들이 거론하는 ‘복지’가 새로운 시대정신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앞으로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난 4월 11일의 총선을 보면, 복지가 새로운 시대정신의 역할을 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인 듯싶다.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 모두 한편으로는 복지 정책의 추진을 당헌에 명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선거 쟁점으로 삼을 의지도 능력도 보여주지 못했다. 특히 민주통합당은 통합진보당과 더불어 시종일관 ‘정권 심판’만을 강조하면서 아무런 비전을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많은 이들로 하여금 과연 야권이 현 정부를 심판할 능력이 있는지 심각한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부디 올 12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는 앞으로 우리 사회가 지향해 나갈 새로운 시대정신이 분명히 드러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