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서로의 자유와 평화롭게 공존해 줄 수 있는 사랑을 할 수 있다면 당신은 하늘의 별을 딴 것이다”, 라는 문장을 읽는다. 목수정이라는 사랑학 연구자-나의 자의적인 명명이다-가 썼다.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책의 249쪽. 이 문장을 들이키는 입 안이 쓰디쓰다. 그 이유는 내가 2주 전 결별했기 때문이다.

이 글의 목적은 첫째, 그에 대한 내 진심을 들여다보고자 함이며, 둘째 그가 아마도 이 글을 읽을 것이기 때문이며, 셋째 비단 이 문제가 우리 둘만의 것이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결별 이후에도 여전히 사랑과 결혼을 꿈꾸는 나에 대한 일종의 메타학습이기도 하다. 여자 대학원생의 결별 이야기는 다른 남녀 대학원생들에게도 무해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10년 전 ‘비혼’이라는 단어에 반했던 건 자유의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그 뒤로 한동안 잊고 지내던 이 단어가 다시 떠오른 건, 고등학교 선생을 1년쯤 했을 때다. 앞길이 마치 ‘결혼’을 향해 직선으로 뻗어있는 듯했다. 그 뒤로 출산, 육아, 내집마련이라는 말들이 보였다. 대안, 탈학교라는 단어들에 끌리고 있던 난 일단 사직을 택했고, 혼자 먼 여행을 다녀왔으나, 이후 오랫동안 경제적 불안정과 함께 지냈다. 

1년 동안 내가 가장 갈망한 단어는 ‘사랑’이다. 시종 의심하고 무관심하려 했던 이 두 글자가 그를 통해 들어왔다. 존 레논의 「Love」를 들었고, 스피노자의 말 “나는 너다”를 곱씹었으며, 외면했던 드라마 「시크릿 가든」을 정주행했다. 여전히 “부서진 별 조각을 한 움큼 움켜쥐고 순수한 환희 속에 하늘을 향해 던졌다”와 같은 자유의 문장을 만나면 가슴이 두근거리지만, 이 자유가 사랑과 공존할 수 있는 균형을 찾고 있다. 

여자 대학원생인 나만이 아니라 남자 대학원생인 그도, 사랑과 결혼이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답이 나오지 않는 복잡한 사람 마음에 시간을 쏟기보다는 차라리 책과 사랑에 빠지는 게 낫다는 암묵적인 동의를 우리는 공유하는지 모른다. 이에 나는, 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을 떠올린다. 그녀는 『위험사회』로 잘 알려진 울리히 벡의 아내이자 동지이며, 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이고,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의 공동저자이다. 

벡 부부에게 사랑은 ‘자본주의 안의 공산주의’이다. 위험한 외부세계 속의 외딴 섬인 사랑은, 일종의 반란이며, 막연하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에 저항할 수 있는 힘과 접촉하는 방식이다. 위험사회의 실존 인물인 그와 내가 그려내는 서사는 사랑의 좌절이라는 일반론을 따를 것인가, 혹은 그 반대일까. 이는 일종의 시험인지 모른다. 사랑과 자유가 공존하는 이어도에서, 둘만의 평화로운 문자를 창제할 수 있겠느냐고, 위험사회가 우리에게 묻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공산주의자였고, 공산주의자일 것이다.

(추신) 그를 위한 한 마디.
구렁이에 물려 피를 토하는 꿈을 꾸고 나서, 책 한권을 꾸역꾸역 읽고는 얻었던 것. “말과 글의 경쟁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글을 쓴다는 것은, 보다 확고하게 잘 사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당신을 위해 보다 덜 사유하고, ‘진리’를 위해 보다 많이 사유한다.” -롤랑 바르트의 『대담집』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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