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불문학과
최근에 내가 무척 좋아하는 소설이 우리말로 번역돼 나온 것을 알았다. 영국 작가 맬컴 라우리의 『화산 아래서』(1947)가 그것이다. 나는 이 책을 프랑스어 판으로 읽었고 그것과 함께 간직하고 있던 영문판은 어딘가 라우리를 닮은 구석이 있는 친구 하나에게 주었다. 너나 나나 누구든 실은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대책 없다는 뜻에서 그랬다. 멕시코 주재 영국 영사 퍼민이 죽어가는 단 하루, 멕시코의 축일 ‘죽은 자의 날’에 펼쳐지는 그의 열두 시간의 명정(酩酊)을 기록한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실제 작가가 그랬던 것처럼 대책이 없다. 퍼민은 알콜 중독. 술 마시는 일을 멈출 수 없다. 라우리 자신도 술을 퍼마시다 술로 일찍 죽었다. 두 술꾼의 몰락은 덧없으면서도 동시에 멕시코 사보텐에서 추출하는 메스칼린의 착란 효과만큼이나, 또는 원색의 앵무새 깃털만큼이나 화려하고 강렬하게 반짝인다. 아침결부터 침침한 벨라 비스타 바에서 술을 마시면서 퍼민은 덤덤하게 말한다. “당신이 나처럼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아침 7시에 도미노 게임을 하는 타라스코 노파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건 또 왜일까, 인디언 노파는 닭까지 안고 있다. 나는 이 장면을 여러번 읽지 않을 수 없다. 읽고 있으면 시간의 비밀스런 리듬에 발맞춰 어둠 속에 희미하게 도사린 어떤 추레한 형태들이 점차 유례없는 의연함의 빛을 얻는 게 선연히 보이는 것만 같다. 퍼민은 언제부터인가 ‘술에 취한 상태인 동시에 취하지 않은 상태’에 도달해 있다. 혹은 죽음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 있다. 그리고 이 말도 안 되게 태연하며 초현실적인 시공간의 아름다움은 그것을 버틸 줄 아는 사람에게만 모습을 드러낸다. 노파, 노파의 닭, 시답지 않은 도미노 조각, 이른 아침의 한산하고 불길한 주점…… 이 모든 얼토당토않은 시각적 파편들의 초라함 사이로 흐르며 그것들을 하나의 잊을 수 없는 광경으로 잇고 심지어 아름다움을 대어주는 것은 물의 열기. 또는 물의 열기처럼 스스로 녹고 흐르고 퍼지는 위험을 마다하지 않는 정신과 마음의 꿋꿋함이다. 술꾼의 파탄이 어떻게 그런 경지에 다다를까. 퍼민은 자신을 부르는 것은 등대이고 심연을 향한 여행이지 일상의 사랑이 아님을 이해한다. 독주를 받아마시듯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이런 종류의 작품들은 바로 거기서 나오는 강렬한 매력으로, 자신의 파열로부터 솟아나는 어두운 섬광으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는 언어만이 가지는 특이한 힘으로 내 마음을 끌어당긴다.

그렇다. 물의 열기며 술꾼의 죽음 따위를 얘기하면서 나는 어떤 역설적 꿋꿋함에 관해 곱씹어 본다. 흔히들 건강한 병듦이라고 부르는 그것 말이다. 문학은 바로 그것을 얻기 위해, 그 상태를 계속 밀고 나가기 위해 전력한다. 대책 없음을 유일한 대책 삼아서. 하지만 죽는 마지막 날의 열두 시간을 길게 벌려 견디며 그 안에 계속 시정(詩情)의 물기가 흐르게 하는 퍼민의 고독한 취기에 관해, 그 끈기에 관해 나는 웅변하듯 예찬을 늘어놓을 수 있을까. 가령 수업 시간에? 영 그러지 못하리라. 일상의 시간, 기호들의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며 그 틈새로 비통한 여행의 시작을 알리듯 스며드는 아득한 물 기운을 새삼 느끼느라고. 삶이 거기 잠겨들다 일순 배를 뒤집으며 반짝 속살을 내비치는데 어찌 말문이 막히지 않을까. 나는 유능한 선생은 못 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설명의 달인 따위는 별로 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김예령 시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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