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물의 열기며 술꾼의 죽음 따위를 얘기하면서 나는 어떤 역설적 꿋꿋함에 관해 곱씹어 본다. 흔히들 건강한 병듦이라고 부르는 그것 말이다. 문학은 바로 그것을 얻기 위해, 그 상태를 계속 밀고 나가기 위해 전력한다. 대책 없음을 유일한 대책 삼아서. 하지만 죽는 마지막 날의 열두 시간을 길게 벌려 견디며 그 안에 계속 시정(詩情)의 물기가 흐르게 하는 퍼민의 고독한 취기에 관해, 그 끈기에 관해 나는 웅변하듯 예찬을 늘어놓을 수 있을까. 가령 수업 시간에? 영 그러지 못하리라. 일상의 시간, 기호들의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며 그 틈새로 비통한 여행의 시작을 알리듯 스며드는 아득한 물 기운을 새삼 느끼느라고. 삶이 거기 잠겨들다 일순 배를 뒤집으며 반짝 속살을 내비치는데 어찌 말문이 막히지 않을까. 나는 유능한 선생은 못 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설명의 달인 따위는 별로 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김예령 시간강사
불어불문학과
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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