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9년 전의 일이다. 당시 정치학과에 재학 중이던 나는 국제정치에 대한 교양과목을 수강하고 있었다. 당시 과목을 담당했던 교수님은 젊지만 매우 명민하시고 의욕이 넘치는 분이셨는데, 한번은 교수님이 핵 억지력에 있어서 그 국가가 실제로 핵을 보유했는지 여부가 중요하다는 취지의 설명을 노상강도에 빗대어 하신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강도에게 위협을 받는다면 그가 칼(핵무기)을 갖고 있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일단 겁을 먹게 되지 않겠냐”는 학생의 질문에 “자네같은 사람은 겁을 먹겠지만 나같으면 맞서 싸울 걸세”라고 면박을 주는 것이 아닌가. 상황이 이쯤 되면 질문한 학생은 입을 다무는 것이 상책이다.

 

비판이 비판이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관용(똘레랑스)이 요구되는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상대방이 무엇에 대해 어떤 수준에서, 무슨 관점 하에 의견을 내세우는 것인지를 파악하고 자신의 의견은 상대의 의견과 어떤 측면에서 차이가 나는지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비판행위는 일면 상당히 골치 아픈 행위이며 차가운 행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를 존중하는 ‘인간에 대한 예의’에서 출발하는 합리적이며 따뜻한 행위인 것이다. 비판행위는 우리 모두 잘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1980년대 이래로 선거를 앞두고, 재야 내부에서는 비판적 지지자들과 독자 후보론자들 간 논쟁이 관행처럼 반복되어 왔었다. 2002년 지방선거 당시 서울시장 선거와 관련해 진중권씨와 강준만씨 간의 김민석-이문옥 논쟁의 경우도 동일한 구도의 논쟁이라 볼 수 있는데, 아쉽게도 비판적 지식인으로 간주되고 있었던 두 사람간의 지면 논쟁은 단 한 순간에 말꼬리 잡기 수준의 비난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배울 만큼 배우고, 같은 길을 표방하던 두 사람이 감정의 나락으로 빠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감춤과 은유의 기제로 장식된 두 사람의 화법 속에서 상대에 대한 예의가 상실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신문이라는 매체 특성상 신랄한 표현이 선호되는 것은 어쩔 수 없겠으나, 이는 무례함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닐 텐데도, 특정 주장에 대하여 거짓말이라는 등의 표현을 사용한 것이나 신문칼럼의 대상이 독자 일반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못하고 자신에 대한 인신공격 쯤으로 받아들여 특정인에 대한 본격적 반격을 가한 것 모두 비판 지식인으로서 부끄러운 행동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문제는 17대 총선에서 단번에 해결되어 버렸다. 바로 정당명부제라는 제도가 선거에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제도변화가 부분적으로는 재야의 두 시각이 오랜 기간동안 독자적으로 노력한 덕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진중권과 강준만 두 사람 모두 맞은 것인가 틀린 것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비판행위는 우리 모두 잘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러기에 상대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무엇을 얘기하고 싶어 하는지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토론에 앞서야 하는 것이고, 이런 노력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한다. 술 먹고 실컷 논쟁한 후에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얘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다”라는 말로 기분 좋게 헤어질 수 있으려면, 논쟁과정에서 감정에 휩쓸리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상대방이 계속 인신공격을 해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공자의 논어를 참고하거나 R. Axelrod의 반복게임 연구를 참고해 보라. 선택은 여러분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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