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 청소노동자 아주머니를 처음 만난 건 2007년 법대 가톨릭 동아리 미사를 드린 강의실에 미사물품을 두고 온 것을 아주머니께서 챙겨주셨을 때 일이다. 분명 그전에도 건물 안에서 자주 스쳤을텐데 말이다. 그때 아주머니도 신자라고 말씀하셔서 자연스레 세례명을 여쭸고 더불어 성함도 알게 됐다. 그 후 뵐 때마다 반갑게 인사드렸고 시간이 지나자 다른 동료분들께도 편안히 인사를 드릴 수 있게 됐다. 

알고 보니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분도 성희 아주머니랑 아는 사이였다. 아주머니께서 그분께 안부를 전해달라고 부탁하셔서 그분께 한번 더 연락할 수 있던 일이 해묵은 마음을 정리하는 데 꽤 큰 도움이 됐다.

오랜 방황 끝에 어쩌다 대학원을 붙었고 학부를 겨우 졸업했다. 성희 아주머니를 다시 뵌 건 졸업가운을 받으러 학교를 들렀던 날이다. 가운을 나눠주고 계시던 아주머니는 나를 보시자마자 아이고 왜 이리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냐고 얼굴 환히 반겨주셨고 다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고 말씀드리니 무척 좋아하셨다. 순간 눈물이 그렁했다. 차마 학교에 발걸음하지 못한 시간들을 나 말고도 헤아리고 있었다는 첫 사람, 겨우 용기내 돌아온 나를 반겨주는 첫 사람이었다. 아주머니는 편하고 예쁜 학사모를 골라주셨고 졸업식날 사진도 같이 찍었다.

개학 후 4월이 다 가도록 얼굴을 한번도 뵐 수가 없어 다른 동료분께 여쭈었더니 시어머니가 치매에 걸리셔서 2월에 그만두시고 고향으로 내려가셨단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다. 아니, 십 년을 넘게 그토록 애써주신 분인데 어떻게 이렇게 소리 하나, 흔적 하나 없이 사라지실 수가 있지? 적어도 공지라도 해서 감사 인사를 드릴 기회를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세상이 굴러가는 꼴을 모르는 바 아니건만 이렇게 몸으로 확 느낄 때마다 매번 마음이 아리고 사람을 소리도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는 그 무시무시한 무언가에 분통이 터진다. 이 무언가는 세상 구석구석까지 뻗쳐 있어 분통은 사방으로 튄다. 이 분통은 나 자신도 피해갈 수 없다. 나도 아주머니를 만나기 전에는 용역업체나 본부의 태도와 다를 바 없이 거기 사람이 없는 마냥 스쳐 지나갔으니 말이다. 그러나 성희 아주머니는 아주머니도 모르게 내 파란만장한 학부 시절과 만만치 않게 파란만장했던 짝사랑을 훈훈히 마무리할 수 있게끔 도와주신, 살과 피를 갖추신 분이셨고, 무엇보다 이름이 있으신 분이셨다.

동료분께 아주머니 번호를 물어 전화를 드렸다. 가시는 줄 모르고 인사를 드리지 못해 연락드렸다고 말씀드리니 고맙다고 하셨다. 당연한 일이거늘 왜 감사해 하시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답답함을 꾹 삼키고 그동안 감사했다고 인사드렸다. 오랫동안 그리 애써주셨는데도 아무 인사 없이 보내드려 죄송하다는 말씀도 드리고 싶었는데 내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듯하여 말을 삼켰다.

김성희 청소노동자 아주머니는 지금 상주시 청리면에 사신다. 시어머니는 많이 좋아지셨다가 전날 목욕탕에서 넘어지셔서 중환자실에 누워계신다고 하셨다. 아주머니는 밭을 매다 전화를 늦게 받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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