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 철 들 무렵의 빛나는 별

머리를 박박 밀고 시커먼 교복을 입고 들어간 중학교는 실망부터 앞섰다. 입학 전에 미리 가 본 교정이 너무 작았던 것이다. 같은 학교를 배정 받은 국민(초등)학교 동창 서넛이 자전거 한 대를 이리저리 타고 가서 교문을 들어서니 운동장이 다니던 학교의 반 만하였다. 그 손바닥 같은 데서 교복 차림의 중학생 형들이 야구공만한 고무공으로 축구를 하고 있었다. 운동장 크기에 딱 어울리는 공이었다. 국민학생 때도 큰 공을 차면서 놀았는데 그것을 보니 더 이상 축구를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책을 읽은 것도 아니라서 좀 맥 없이 다녔다.

목이 쉬어 가던 2학년 때 매우 넓은 교실에서 1년을 보냈다. 70여 명이 앉고, 옆과 뒤는 말타기와 격투기를 하고도 남았다. 천장은 지금 강의실의 2배쯤 높았고, 바닥은 마루였다. 마루 바닥의 부후(腐朽)를 막기 위해 해마다 3월에는 콜타르를 발랐다. 바른다기보다 통채로 부어 놓는 것이었다. 벽은 말할 것도 없고 높은 천장에도 발자국이 있었다. 천장을 어떻게 밟았을까! 못할 짓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새까만 교실 바닥, 새까만 교복의 까까머리들.

이들을 완벽하게 제압한 국어 선생님은 여 선생님이셨다. 물론 미혼(未婚)이었는데, 손목에는 대학 수석 졸업 상품으로 받은 묵직한 남자 시계를 차고 다니셨다. 직원이 수석 졸업생은 으레 남학생이겠거니 하고 남자 시계를 준비했다는 것이다. 시계 탓인지 그 선생님은 좀 독(毒)하셨다. 그래서 소년들이 야릇한 마음을 품을 여지는 없었지만, 가르쳐 주신 것은 많았다. 가끔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시를 칠판에 적고 베끼게 하셨는데, 이상용, 강은교, 유안진, 윌리암 워즈워드, 엘리자베스 브라우닝 같은 시인들이었고, 그 중에서도 윤동주는 시집을 직접 보여 주기까지 하셨다. 학사모를 쓴 그 순하고 간결한 눈빛의 사진이 실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 시집에는 사진이 몇 장 더 있었다. 고결한 영혼의 소유자가 동네 형처럼 다가온 것은 겉모습 때문이었다. 시인을 요절(夭折)시킨 장본인이 씌운 굴레를 30 년이 넘도록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온 몸에 걸치고 다닌 덕분에 식민지의 청년과 해방된 나라의 후예는 외양이 꼭 같았다. 수첩을 넣었는지 불룩한 가슴 주머니만 빼고. ‘서시’도 그 수첩에 썼을까. 선생님이 적어 주신 시에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고 하는데, 왜 그런지는 몰라도 같이 괴로워지는 것 같았다. 숙제가 괴롭고, 하지 않은 날 검사를 당할까 더 괴롭고, 걸리면 참으로 괴로운 건 몸으로 자주 겪어서 잘 알지만, 엄동설한의 삭풍도 아닌, 잎새에 살랑이는 바람에 왜 괴로워했을까? 나라를 잃어서? 시험에 나왔다면 답으로 찍었을 터.

철이 들어가던 무렵에 베껴 쓴 시들은 교실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기름 냄새와 머리 위 어지러운 발자국과 알 듯 모를 듯 꿈틀거리는 가슴이 혼재하던 시절, 숙제의 괴로움과는 전혀 다른 괴로움을 안겨 주었다. 제목처럼 시어처럼 시편들은 빛을 내고 있었다. 밤하늘의 별빛과 초원의 빛과 남으로 낸 창의 구름과 새소리는 자꾸 읽다 보면 그렇게 보이고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고1 때 손에 넣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대학 때도 종종 읽곤 하였다. 그러다가 한동안 책이 어디 있는지도 잊고 있었다. 연전에 책을 몽땅 옮길 일이 있어 정리하다가 발견하여 챙겨는 두었다. 이 글을 쓰면서 펼쳐 보니 사진이 실린 면은 습기가 스며, 눌러 붙어 못 쓰게 되어버렸다. 새 책을 사서 가까운 데 놓고 손 가는 데로 펼쳐 보아야겠다.

이창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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