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상습적인 학교폭력으로 동급생의 자살에 원인을 제공한 혐의로 기소된 중학생들에 대해 법원이 교화를 위한 보호처분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자살이라는 비극적 결과에 대한 책임을 모두 가해 학생들에게 물어 징역형으로 처벌하는 것은 범죄 행위에 대한 고유의 책임에 상응하는 적정한 응보라고 보기 어렵다”며 판결 근거를 들었다. 그런데 이 기사가 나온 이후 인터넷상에서 재판부에 대한 비난의 댓글이 쏟아졌다. 거기에는 ‘왕따’ 가해자를 감싸는 무책임한 재판부는 물러나야 한다며 석궁을 들고 찾아가겠다는 난폭한 언사도 껴 있었다.

지난해 한국 사회를 들끓게 한 대구 중학생의 자살 사건을 떠올려보면 집단 따돌림 문제에 대한 반감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14살 소년에게 가해진 가혹한 행위와 폭행, 그리고 결국 죽음으로 이어진 비극은 나라 전체를 충격에 휩싸이게 했고, 이러한 여론을 반영해 숨진 중학생을 괴롭힌 것으로 확인된 동급생 가해자들에 대해 실형이 선고되기도 했다. 하지만 실형 선고 보도를 접하고 가해자 학생들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우리 역시 이들이 실제 처한 상황에는 무관심한 채 처벌이라는 폭력으로 이들을 ‘왕따’ 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린이날을 맞이해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주관적 행복지수는 OECD 23개국 중 최하점을 기록했다고 한다. 한국 아이들은 평일 하루 평균 7시간 50분을 공부하는 데 사용하고 있으며, 그에 비해 수면 시간은 OECD 국가 중 가장 적었다. 이런 현실 속에서 공부 못해서 자살하고 왕따 당해서 자살하고 공부 못해서 왕따를 당하는 바람에 자살한다는 말이 떠도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집단 따돌림의 가해자와 그 부모까지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정작 학생 인권문제에 있어서는 무관심한 것 같다. 지난 1월 서울시교육청에 의해 공포된 학생인권조례는 교육과학기술부의 반대로 통과되지 못하고 있으며, 교과부의 학교폭력 실태 조사에 근거해 ‘일진’ 학교 낙인찍기에는 앞장섰던 보수 언론이 학생 인권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하고 있다.

스테판 에셀은 그의 책 『분노하라』에서 분노야말로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라며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를 바란다고 당부한 바 있다. 하지만 그 분노는 더 큰 정의와 자유를 위한 것이어야지 공격하기 쉬운 대상에 대한 무분별한 증오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히려 우리는 학생 인권에 반대하는 이들에 대해, 민간인 사찰의 ‘일진’은 밝히길 거부하는 권력 수뇌부에, 우리가 정말로 분노해야 할 대상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는 언론의 현실에 분노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김수영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안지영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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