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교육과
지난 주 담양 일대 답사를 다녀왔다. 노천명의 ‘푸른 오월’이라는 시를 떠올리게 할 만큼 오월의 신록은 고혹적(蠱惑的)이고 나아가 뇌쇄적(惱殺的)이었다. 그런데 시인이 읊은 대로  ‘계절의 여왕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하는 느낌이 나를 신록에서 외돌려 놓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녹음 속의 정적을 깨고 하늘로 솟구치는 꿩소리처럼 기억의 각질을 치고 나가는 파열음의 진원이 짚어지는 듯싶었다. 지난 두 해 동안 한국학술단체총연합회 일을 맡아 했다. 그 가운데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으로 ‘연구윤리’와 연관된 포럼을 조직하고 수행하는 데 많은 시간을 나누어 써야 했다.

헌신적으로 일했다고 그 성과가 모두 성공적일 수는 없다. 그 성과에 대해서는 아직 판단이 이르다. 또 문제가 그치질 않고 계속 불거지는 게 현실이다. 어느 시대 사람들의 이념적 합의나 지향이 문화로 정착하는 데는 일정한 시간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연구자들이 연구윤리에 대해 자각적으로 논의를 진행하고 그 실천에 투구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 우리로서는 좀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야 하는 자세도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자학(自虐)을 하다시피 스스로 연구윤리의 완성을 위해 초조해 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라 할 수 없다. 

그래서 장성 백양사(白羊寺) 비자나무와 갈참나무 어우러진 숲길을 걸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수령 700년을 헤아리는 갈참나무를 올려다보면서 대학에서 교수로 일한다는 게 어떤 것인가를 자문해 보았다. 백양사 화두비에 새겨진 ‘이 뭐꼬’ 하는 물음을 반추해 본 것이다.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자리에서 있는 이들은 연구윤리를 직접 실천함은 물론, 연구자로서의 역할모델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윤리적 깨달음의 진경에 이른 인격자로서 연구자상을 정립해야 한다. 이런 당위적 요청이 현실의 잡음 속에 묻히고, 연구윤리를 모색하는 이들에게 실망과 좌절을 안겨준다.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연구의 제도 문제, 시대이념의 문제, 이상과 현실의 길항 등 여러 문제가 복합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근원적인 문제는 자신이 수행하는 일에 대한 가치의식의 결핍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가치의식의 기반은 미의식이다. 미의식은 다른 말로 놀랍다는 경이로움에 연관된다. 경이감은 경탄(驚歎)을 거쳐 외경(畏敬)에 이르게 한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내가 다루고 있는 대상이 경탄을 자아내게 할 때, 나는 그 대상을 한갓된 수단이나 방법으로 대할 수 없다. 생물학자에게 개미 한 마리는 생명의 떨림으로 다가온다. 물리학자에게 운석에 새겨진 문양은 우주의 역사와 그 신비를 읽어내게 한다. 조경을 하는 사람에게 소쇄원(瀟灑園)은 한국 정원의 원형을 일깨운다. 아름답다는 황홀감, 놀랍다는 경외감 속에 있는 인간이 어찌 그 대상을 소홀히 다룰 수 있겠는가. 지고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천속함을 녹여내고 인간 스스로 지순의 존재가 되도록 습염(習染)해 준다. 쉬운 말로 인간을 정화시켜 준다.

연구윤리를 의식 차원에서 일깨우고 그 실천이 구경적 존재로서 인간의 큰 길이라는 것을 터득하게 하기 위해서는 존재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 연구윤리는 미의식과 이렇게 연관된다.

내가 하는 연구가 경이롭고 본질이 아름답다면, 그리고 그러한 일을 하고 있는 내 존재의 가치가 무상의 것이라면 그저 ‘무색하고 외롭기만’ 하겠는가. 한마디로, 존재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이 행위의 윤리성을 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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