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에서 단막극(One act play)은 1막으로 이뤄진 극, 즉 장소의 이동 없이 한 공간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짧게 다루는 극을 가리킨다. 이런 단막극은 무대 위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TV 드라마의 단막극은 단편적인 주제에 집중해 빠른 호흡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드라마 장르로 실험적인 영상, 색다른 소재로 마니아층의 사랑을 받아 왔다. 2008년 지상파 3사 정규 편성에서 모두 사라지며 마니아들의 안타까움을 샀던 단막극이 지난 2010년 KBS 드라마스페셜로 2년 동안의 암흑기를 깨고 다시 돌아왔다. 한번의 암흑기를 딛고 새로운 막을 연 단막극은 특유의 신선함을 무기로 시청자들에게 다가가려 노력하고 있다. 『대학신문』은 이렇게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래를 준비해나가는 단막극의 모습을 짚어봤다.

글: 최학모 기자 greenchm@snu.kr

단막으로 도전하다

드라마 실험실로서의 단막극

최근 외국 드라마 열풍이 불어닥치면서 한국 드라마계도 지각 변동을 겪고 있다. 시청자들은 수사물이나 의학물처럼 전문성을 요하는 장르를 시추에이션 드라마의 형태로 매회 긴박하게 그려내는 외국 드라마에 신선함을 느꼈다. 하지만 자본이 충분치 않은 우리 드라마 제작 여건에서 곧바로 장편 드라마에 새로운 형식을 반영하기란 쉽지 않다. 이에 작품의 길이가 짧고 상대적으로 제작비가 저렴한 단막극을 통해 장르 및 형식상의 실험이 시도되고 있다.

지난해 방영된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그간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었던 심리 스릴러 장르다. 박연선 작가는 8부작에 걸쳐 ‘악(惡)의 근원’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때문에 극은 성장과 불안을 동시에 간직한, 겉으로도 속으로도 회오리 바람이 몰아칠 나이인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다. 눈 속에 고립된 입시명문 기숙형 사립고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는 크리스마스 연휴 동안 학교에 남아있던 7명의 학생들과 연쇄살인범의 심리전을 그린다.

극은 7명의 학생들에게 저주가 담긴 의문의 편지 한 통씩이 배달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작가는 전반 4회에 걸쳐 편지에 쓰인 단서를 퍼즐처럼 맞춰가며 발신인을 추리해나가는 데 주력한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후반 4회에서 펼쳐진다. 7명의 학생 각자의 트라우마와 콤플렉스만을 콕콕 집어가며 극한에 가까운 죽음의 공포를 주입하는 연쇄살인범과, 그에 맞서 살아남으려는 아이들의 싸움에선 어느 순간 드라마의 처음 뚜렷했던 선과 악의 구분은 의미를 잃는다. 극의 후반 시청자들은 자문하게 된다.

‘악은 선천적인 것일까. 길러지는 것일까.’


뿐만 아니라 이 드라마는 실험적인 영상으로 등장인물의 감정상태, 극 전체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드러냈다. 예컨대 시계탑 그림자가 드리운 흰 눈 위에 한 여학생이 팔목을 긋고 누워있고 흰 눈에 붉은 피가 꽃처럼 번지는 것 같이 묘사하는 식이다. 학생들의 마음이 점차 분열돼감을 보여주기 위해 각도와 위치가 서로 다른 거울에 비친 학생들을 한 카메라 앵글에 담은 장면 역시 백미로 꼽힌다.

「도망자 이두용」, 드라마스페셜 연작시리즈 「특별수사대 MSS」, 「강철본색」. 이 세 작품의 공통점은 주인공의 이름이 모두 ‘노철기’로 동일하다는 점이다. 3편의 시리즈는 배경과 주변인물, 시대 상황까지 모두 제각각이지만 주인공의 이름, 처지,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도망자 이두용」과 「특별수사대 MSS」에서의 노철기는 좌천된 경찰이고,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강철본색」에서의 노철기는 돈이 되면 뭐든 하는 생계형 해결사로 전락해버린 조선판 좌천 경찰, 좌포도청 조사관으로 분했다. 이는 동일인물 하나가 독립적인 이야기들에 재등장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피카레스크식 구성으로 기존 TV 드라마에서는 보기 힘든 형식이다.

이렇게 실험성이 강하다고 해서 대중들의 외면을 받는 것은 아니다. 「화이트크리스마스」는 많은 인기를 얻어 DVD로 제작됐으며 휴스턴 국제영화제 TV시리즈(가족/청소년 부문) 대상을 수상해 예술성도 인정받았다.

단막극, 당대를 포착하다

단막극은 호흡이 짧은 만큼 하나의 단편적인 주제를 채택해 작가가 의도한 감정이나 주제로 몰고가는 스토리텔링을 특징으로 한다. 만약 작가가 선택한 주제가 사회문제라면 어떨까? 최근 단막극 PD나 작가들은 ‘외모지상주의’, ‘88만원 세대’, ‘이념과 소통’ 등을 소재로 현 사회문제에 대한 견해를 적극적으로 표출해 시청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단막극은 이야기가 짤막해 현대 사회의 문제를 보다 빠르게 뽑아낼 수 있다.

「82년생 지훈이」는 갓 서른이 된 82년생 ‘지훈이’를 통해 신자유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철부지 비정규직의 애환을 그려낸 작품이다. 지훈은 수도권에 자신의 집, 차, 가정을 갖고 소박하게 사는 게 꿈이다. 하지만 계약직으로 근무하고 있는 회사에선 실적을 못 올리면 자른다고 협박하고 여자친구는 집 없이는 결혼 못하겠다고 하며 지훈의 골머리를 썩인다. 게다가 상품 하나 팔아보겠다고 급식위원으로 나서고 캐디까지 하며 고객에게 아부하는 지훈의 모습은 안쓰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막상 집에 들어가면 지훈은 철없이 부모와 환경 탓만 할 뿐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려 하지는 않는다.

극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그는 일, 사랑, 가족의 갈림길에서 방향을 잃고 세상에 울부짖는다. “회장님도 젊었을 때 이랬어요? 죽어라 뛰는데 계속 그 자리였어요? 얼마나 더 아프고 얼마나 더 잃어버려야 저도 어른이 될 수 있어요?” 프레젠테이션을 하던 도중 지훈이 고객 앞에서 울컥 내뱉는 이 대사에는 전국의 2~30대 비정규직 사원의 마음 한켠에 서려있을 서러움과 막막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 단막극에서는 지훈과 같은 비정규직 청년들이 처한 사회현실의 문제를 진단하고 이 속에서 갈 길을 모색하는 청년세대의 고민을 드러내기도 했다. 실제로 지훈은 대출을 받아 집을 산 다음, 대출금을 갚아 나가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극의 전반부에서 지훈은 이자를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악질적인 제도이자 가장 논쟁적이고 철학적이며 심오한 발명’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는 계속해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밀어 올리듯 이자라는 바위를 감당해야 하는 시지프스 같은 우리들의 삶을 비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난해 방영된 「이중주」는 보수논객 시아버지와 탈북자 며느리가 서로에 대한 오해를 누그러뜨리고 화해하게 된다는 내용을 다룬다. 이야기는 우리나라 대표 보수논객의 집에 탈북자 며느리가 찾아오며 시작된다. 보수논객 한수설 교수는 어렸을 때 6·25 전쟁으로 어머니를 잃었던 아픈 기억으로 지금까지 악몽을 꾼다. 애지중지하던 아들은 탈북자를 상대로 봉사를 다니다 탈북한 여자와 만나 아버지와 연을 끊고 집을 나가 살다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런 인생 역정으로 인해 한 교수에게 북한이란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 그 자체다. 며느리는 자신도 이 집의 식구라는 뜻으로 매일 아침 시아버지와 겸상하려 하지만 시아버지는 지팡이로 상 위를 쓸어내면서 불쾌함을 표출해 갈등을 고조시킨다.

이렇게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평행선을 그리던 이들은 아직 이념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아이를 보며 마음을 연다. 남과 북, 보수와 진보 간 치열한 이념 논쟁으로 ‘소통’의 가치와 중요성이 대두되는 지금, 이 드라마는 이런 현실을 포착해 이념 이전에 서로를 알아가며 소통하고 공존할 필요가 있음을 대중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단막극, 다시 자리매김하기 위해

시청률의 사각지대, 단막극

지난 몇년간 지상파에서는 정규 단막극 프로그램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모두 저조한 시청률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10년 KBS가 2년 전 폐지됐던 단막극 프로그램 ‘드라마시티’를 ‘드라마스페셜’로 바꿔 안방극장에 부활시켰지만 여전히 5% 안팎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밑바닥 시청률’ 신세는 면치 못하고 있다. MBC와 SBS의 경우에는 현재까지도 단막극 프로그램 재편성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처럼 단막극은 장르 자체가 시청률이 낮기 때문에 광고 수주가 상대적으로 적은 심야 시간대에 편성되는 편이다. 대표적인 장수 단막극 프로그램이었던 MBC ‘베스트극장’은 토요일 오후 11시 40분에 전파를 탔고, 드라마스페셜 역시 시청률이 극히 낮은 일요일 밤 11시 45분에 방영되고 있다. 광고 수익으로부터 제작비를 얻어야 하는 방송국의 경제논리상 단막극은 충분한 제작비를 마련하기 힘들기 때문에 편성이 변두리로 몰리는 고질적인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특히 단막극은 촬영 분량이 짧기 때문에 연속극보다 제작비 사용에 효율성이 떨어진다. 드라마평론가 윤석진 교수(충남대 국어국문학과)는 “단막극은 매번 바뀌기 때문에 이를 담을 세트를 새로 기획하고 제작해야 하므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기 어렵다”며 “방송국 입장에서는 당연히 단막극을 생산성이 낮은 장르로 인식해 편성 과정에서 배제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최근 방송국이 드라마 프로그램을 외주제작사에 맡기는 외주제작의무편성제도(외주제작제) 의존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단막극의 방송계 내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본래 외주제작제는 방송의 비대화를 견제하고 프로그램을 다양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도입됐으나 시청률 지상주의가 팽배한 현 방송시장 속에서는 안정적인 시청률을 담보하는 작품만 선택하는 결과로 귀착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대중의 관심도가 낮고 경제성이 떨어지는 단막극은 외주제작의 가속화와 함께 방송 편성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

재도약을 위한 단막극의 발판

단막극이 경제논리에 구속받지 않고 지속적으로 제작되는 프로그램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재정 지원이 절실하다. 방송사는 시청률 및 광고 문제와 이익 관계가 긴밀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단막극을 재정적으로 선뜻 보조하기가 쉽지 않다. 현재로서는 2년 전부터 실시되고 있는 정부 차원의 지원이 단막극 제작 활성화에 보탬이 되고 있다.

지난 2010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방송영상콘텐츠제작지원’에 신설한 단막극 부문은 외주제작사를 상대로 편당 최고 1억원까지 제작비의 80%를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이종석 방송영상산업팀 과장은 “올해는 지난 3일 선정한 단막극 9작품에 9억원 정도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 역시 지난해부터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 받은 방송통신발전기금에서 일정 부분 떼어낸 20억원을 방송국이 단막극을 제작하는 데 지원하고 있다. 특히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은 제작비를 지원받은 작품이 반드시 TV수상기를 통해 송출돼야 한다는 조건을 명시해 단막극이 안방극장에 설 기회를 보장한다.
정부의 제작 지원 노력에도 단막극 장르 자체가 시청자의 관심을 얻지 못하면 궁극적으로 단막극의 어려움을 타개하지 못할 것이다. 이에 지난해부터 방송통신위원회는 ‘단막극페스티벌’을 주최해 단막극에 대한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는 데 앞장 섰다. 단막극페스티벌에서는 호평을 받으며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화평공주 체중감량사」 등을 포함한 12개의 작품이 상영됐다. 상영 이후에는 PD, 작가, 배우와 관객들이 각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 마련됐을 뿐 아니라 단막극의 발전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세미나가 개최되는 등 단막극이 시청자들에게 한발짝 다가서는 자리였다는 평을 받았다.

단막극, 어떻게 변화해야 하나

단막극을 활성화하기 위한 지원책과 자구책에도 방송국 내 편성 현황은 단막극의 장래를 어둡게 하는 요인 중 하나다. 실제로 MBC의 경우 단막극 편성을 둘러싸고 다양한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있다. 한국드라마PD협회장을 역임하고 있는 MBC 이은규 PD는 “작년에 일선 PD가 외부로부터 단막극 지원을 받아왔지만 수익성을 우선시하는 경영진과 단막극의 가치에 공감하지 못하는 시사교양·보도제작국 등 다른 분야 PD들의 거센 반대로 편성 과정에서 제외됐다”고 단막극이 부활하지 못하는 현재의 상황을 전했다.

빈번한 편성 실패의 대책으로 학계나 현장에서는 방송 편성시 단막극을 위한 쿼터를 제정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의무 방영 시간대가 설정된다면 이전보다 시청자들이 단막극을 접하는 기회가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명환 명예교수(송담대 방송·영상학부)는 지난해 2월 한국방송작가협회와 한국PD연합회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매주 1회 이상 시청률과 제작비 회수율 부담에서 자유로운 ‘그린 존’과 시추에이션 드라마 등을 통해 혁신적 실험이 가능한 ‘블루 존’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화연대 홍성일 미디어문화센터 운영위원도 “미국에서는 드라마 시즌 시작 전 파일럿드라마 방송기간이 있다”며 “매년 1~2주 정도 단막극 주간을 만들어 방송국이나 외주제작사 모두 단막극을 선보이도록 해야한다”고 말했다.

나아가 단막극 자체가 시추에이션 드라마나 TV 영화로 탈바꿈하는 방향도 논의되고 있다. 시추에이션 드라마란 미국 드라마처럼 매화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전문성을 담아 전개하되 개별 에피소드가 완결성을 띠는 드라마이고, TV 영화는 말 그대로 TV상영만을 목적으로 만든 영화다. 우리보다 TV 방송 역사가 긴 영국, 미국, 일본에서는 대체로 순수 단막극의 비중은 줄었지만 시추에이션 드라마나 TV영화가 브라운관을 지배하며 단막극의 다양성, 실험성을 계승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시추에이션 드라마 실험의 대표적 예인 MBC 베스트극장의 「태릉선수촌」은 시리즈 형식으로 국가대표 이야기를 참신하게 다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오는 6월 방영될 KBS 드라마스페셜 시즌3의 CP를 맡게된 KBS 황의경 드라마제작국 PD는 “이번 드라마스페셜 시즌3는 시즌1과 시즌2의 방식을 따르되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해 단막극의 생존 전략이 될 수 있는 TV 영화를 몇편 제작해볼 계획”이라고 밝혔다. 특히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은 단막극 분야를 순수 단막극과 TV 영화 부문으로 세분화해 지원해 이러한 대안에 현실성을 더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단막극이 가야할 길은 멀고 험하다. 이은규 PD는 “우리나라에서도 시추에이션 드라마나 TV 영화를 향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지만 단막극이 존폐위기에 처하면서 발전이 지체된 과거가 있다”며 단막극 제작 현실이 여전히 불안정하다고 지적했다. 낮은 생산성으로 우리나라 방송 현실 속에서 소외받는 단막극이 진정으로 부활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과 대안 모색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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