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대 협동과정 과학사 및 과학철학 박사과정
우리는 여러 매체들을 통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표현을 자주 접한다. 이 표현은 ‘귀족이라고 주장하고 싶으면, 귀족답게 행동하라’라는 뜻을 담고 있다. 흔히 사회지도층에게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국민의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할 때 사용된다. 그리고 이들이 의무를 실천했을 때, 그들을 칭송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좋은 의미를 담고 있고, 사회 통합을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강조하는 이들이 즐겨 드는 예들 중 하나는 유럽의 귀족들이 전장에서 보여준 희생정신일 것이다. 실제 전투 희생자들을 분석해보면 귀족 장교의 희생이 매우 많았다. 이에 더해 유럽의 귀족들은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자신들의 재산을 쏟아 부어서 휘하의 부대를 유지하고 병력을 모집했다. 이는 한국의 소위 지도층이라 불리는 이들이 병역 의무를 회피하려는 모습과는 극적으로 대조되는 사례이다. 지도층들이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누가 따르겠는가?

그런데 이를 정말로 희생정신이라 부를 수 있을까? 프랑스 혁명 이전의 유럽의 군대들은 거대한 직선 대형을 고집했다. 이러한 대형을 고집한 이유는 일반 병사들을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귀족들이 생각하기에 평민 출신의 병사들은 비천하기 때문에 희생정신을 요구한다던가, 자율적 행동을 기대할 수 없었으며, 이러한 고귀한 정신은 오직 같은 귀족들이나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병사들을 한데 모으고 근접 통제하려고 했던 것이다.

귀족들이 평민들에게 가지고 있던 이러한 경멸감은 귀족 계급이 향유하고 있던 엄청난 특권을 정당화하는 편견에 불과했다. 그들이 가진 수많은 특권은 그들이 국가를 위해 죽음도 불사한다는 주장으로 정당화 되었으며, 따라서 용기, 명예, 희생과 같은 정신들은 평민들이 가져서는 안 되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사실 비정상적 특권의 정당화 장치였던 것이다.

현대는 어떠한가? 소위 지도층이라 불리는 이들이 병역 의무를 수행하고, 세금을 제대로 내고, 때때로 기부를 하는 것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칭송받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소득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나 ‘권리에는 의무가 따른다’와 같은 원칙들을 수용한다면, 지도층들의 ‘희생’은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의무의 일부일 뿐이다. 따라서 ‘노블레스’를 붙일 이유가 없다. 언급한 행위들은 일반 시민들도 잘 수행하고 있다. 똑같은 행위가 왜 지도층이라는 이들이 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되어 칭송받고, 일반 시민들의 행위는 당연한 의무가 되어 무시받을까?

당연한 의무에 ‘노블레스’를 붙이는 것 자체가 차별을 인정하고 특권층의 존재를 정당화할 것을 요구한다. 더 나아가 어떤 사회가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의존한다면, 그 사회의 제도가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할 정도로 불충분함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적절한 복지제도가 갖추어지지 않은 사회일수록 특권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의존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러한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시혜를 베풀고 ‘희생’하는 특권층의 힘이 커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사회가 이러한 것이었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사실 달콤하게 보이는 독사과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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