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청소년 드라마를 무척 좋아했다. 「케빈은 12살」로 시작되어 「사춘기」 그리고 배두나와 최강희의 「학교」까지. 마지막으로 빠져들었던 것은 고아라와 유아인이 나왔던 「반올림」이다. 그 곳의 주인공들은 많이 미숙하고 부족하다. 그럼에도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지금의 성장통을 겪고 나면 더 좋아지라는 희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2008년, 「반올림」이라는 이름이 다시 들려왔다. 젊은이들이 가장 선망한다는 기업에서 일하던 한 노동자의 죽음 이후였다. 이를 계기로,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까지 평가받는 세계적 일류기업의 노동조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그곳의 많은 노동자들이 희귀질환을 앓고 있음이 뒤늦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현재 밝혀진 노동자는 137명, 그 중 55명이 사망했다.

기업은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업무상 재해임을 이유로 국가에 산재 신청을 했지만, 현재까지 그중 1명만 승인받았다. 근로복지공단은 노동자들에게 스스로 업무와 질병간 인과관계를 입증할 것을 요구했고, 노동부는 어떤 화학물질이 사용되는지 알려달라는 요구를 기업의 영업비밀 보호를 이유로 거절한다. 국가로부터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노동자들은 홀로 진실규명에 나서야 했다. 산재를 인정하는 법원 판결이 났지만, 국가는 불복하고 항소한다. 그리고 이 재판에 기업측 변호사들이 참여하고 있다. 최근 이러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 발간됐지만, 대부분의 언론으로부터 광고를 거절당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 기업은 특별한 존재로 대우받기 시작했다. 기업에게 좋은 것은 우리에게 좋은 것이라 여겨지며 기업의 경쟁력을 위해 국가적 지원이 뒤따르는 것이 당연해진다. 그러나 이윤창출을 최우선으로 하는 사기업이 예외적 존재로 자리매김한 순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 강자라는 이유로 불법이 용인되며, 기업 이윤이 국가 정책의 결정 기준이 되어 공공성은 무의미해진다. 

4조원대의 차명 재산이 드러났음에도 온전히 상속을 인정받아 도리어 손쉽게 그룹을 계승한다. 다만 7천억원을 둘러싼 형제간의 소송이 스캔들로 번질 뿐이다. 조사를 하러 온 공무원을 물리적 힘으로 막아도 4억원의 벌금을 내면 그만이다. 태안 앞바다 기름유출사고의 배상 책임은 국가로 넘긴 채, 용산 참사와 의료민영화 그리고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과 같은 사회적 논란이 벌어지는 장면에선 주역으로 등장한다.

반도체는 클린룸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먼지 없는 방이 사람한테도 클린한 것인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그렇게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노동조합은 기업의 무노조 이념 앞에서 먼지처럼 사라졌다. 노동자들이 죽어가는 동안, 그 이념은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좌파로 불렸던 지난 정부의 핵심 구성원들이 이 기업과 밀월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그 시절 노동과의 끊임없는 불화는 당연했던 것이리라. 지난 정부를 계승하는 이들이 다시금 진보를 자임하고 나서고 있다. 어쩌면 최근 진보를 둘러싼 진통은 그 때의 교훈을 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노동자들이 민주주의에 희망을 가질 수 없는 곳에서 민주주의는 살아남을 수 없다. 노동 없는 진보는 없다.

김경근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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